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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잡지 기고문, 연재, 논문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옥성득,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다시 읽기," <기독교사상>, 2019년 5월호

‘평양 대부흥’은 1907년 1-6월 평양 시내 장로회와 감리회의 교인들과 학생들에게 일어난 회개와 각성 운동이었다. 성령 강림으로 심각한 죄를 회개하고 공개 자백, 중생 체험, 용서, 배상, 헌신을 통해 교회가 변하고 많은 불신자들이 개종하였기에 ‘대’부흥이었고, 평양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된 점에서 ‘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이를 처음부터 부흥이나 대부흥(great revival)으로 불렀고, 종교 각성(awakening)이나 오순절(Pentecost)로도 불렀다. 그러나 이 부흥 운동은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 글에서는 ‘평양 부흥’으로 부르겠다. 이 글은 여러 책에 나오는 평양 부흥의 배경, 전개, 결과 등은 반복하지 않고, ‘평양 부흥을 어떻게 하면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볼 수 있을까?’라는 관점으로 접근해보려고 한다. 


| 해석사 문제 
지난 110년 동안 여러 교계 그룹이 평양 부흥의 영맥을 계승하거나 단절하기 위해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고 경쟁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 심령부흥회의 민족 복음화론, 1960년대 토착화신학의 무교 담론, 1970년대 대형 전도집회의 교회 성장론, 1980년대 민중신학의 비정치화(친정부, 친일, 친독재, 친미, 선교사 중심) 비판, 1990년대부터 2007년 백주년까지 구국기도회로 대변되는 정치화(반정부, 반공, 친미) 담론과 세계 기독교(국제적 연결성) 담론을 통한 자기 교파 신학의 계보 확보, 2010년대 오순절 신학 담론(방언, 축귀, 치유)과 탈식민주의 비신화화론과 계몽으로서의 부흥운동 등이 교차 혼재해 왔다. 이러한 신학적 진영주의와 교파주의적 해석이 대립하므로 이들 간의 화해는 어려운 실정이다. 

가장 이슈가 되는 부흥과 비정치화 문제만 보자. 최소한 세 관점이 존재해왔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고종과 대한제국이 보수화되면서 개혁의 동력은 사라졌다. 선교사들도 정교분리로 들어가 한국 정부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1901년 대기근으로 인한 농촌 몰락과 국가 재정의 고갈, 부패한 지방 관료의 무능 속에서 천주교회 교폐가 증가하는 가운데, 하디를 비롯한 ‘신비파’ 선교사들이 1903-07년 부흥운동을 주도하자, 서울 선교사들과 평양의 교육 선교사로 이루어진 소위 ‘문명파’ 선교사들은 방조하게 된다. 정리하면 (1) 교회의 비정치화는 전자인 신비파가 주도했다. (2) 문명파 선교사들은 부흥을 계몽(문명개화)운동의 일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2-A) 이 계몽을 1905-10년의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보면 부흥운동을 민족주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B)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정책을 지지한 친일파 래드(G. T. Ladd) 교수처럼 부흥운동의 ‘계몽’을 미개한 한국인을 깨우치고 회개시켜 일본의 문명통치를 수용할 준비를 시킨 것으로 보면 비정치화가 된다. 

1980년 광주항쟁 이후 민중신학 1세대는 (1)을 비판하다가 2세대에 와서 (2-B)를 추가했다. 민족주의 실증주의 교회사가들은 (1)과 (2-A) 사이를 오갔다. 최근 탈식민주의 신학이 (2-B)를 주장한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이미 1908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래드 교수가 주장한 내용이었다. 

래드는 부흥운동에서 드러난 조선국 교인들의 죄 자백을 보면, 조선인이 얼마나 원시적, 미신적, 비도덕적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곧 미개한 조센징을 일본이 통치하면서 계몽하여 근대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의 짐’의 일본식 번역이었다. 여기에 기독교는 약간의 계몽적 역할을 할 수 있으나, 정치, 교육 등 총체적 계몽을 위해서는 식민 통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Ladd, In Korea with Marquis Ito, 1909, 296-297.) 그는 이 계몽 프로젝트에 선교사와 기독교가 동참할 것을 주문했다. 그것은 사실 이토 히로부미가 정교 분리의 모토인 ‘정치는 통감부가, 도덕은 기독교가’를 내세우며 기독교를 비정치화한 논리였다. 그들에게 부흥운동은 조선인 계몽과 식민화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부흥운동을 비정치화 계몽운동으로 보는 탈식민주의 학자는 기실 110년 전 일본 관리나 친일파의 식민주의 해석을 수용하는 셈이다. 

교회의 부흥으로 영성 강화(비정치화), 부흥과 애국계몽운동의 결합(토착화와 민족화), 식민 계몽 프로그램(식민화)이라는 세 가지 관점이 지난 40년간 경쟁해왔지만, 실제로는 1907년부터 경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 논의가 간과한 다음의 네 가지 점을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 첫째, 선교사들의 다양성과 비동질적 정치성과 신학. 특히 교육과 의료 선교사들은 부흥 운동과 거리를 유지하거나 비판했다. 둘째, 부흥을 통한 계몽의 범주 확인. 종교적 각성과 문명적 계몽은 구분해야 한다. 셋째, 1907년 장로회 부흥에서 중심지인 평양과 변두리인 서울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넷째,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반응과 운동 전개이다. 

민중신학은 비정치화를 강조하지만 일면만 본 것이다. 평양 부흥의 긍정적 결과로는 복음주의 영성의 형성, 문명개화와 민족운동 기여, 한국적 기독교의 토착화, 급성장을 통한 한국 개신교의 기원이 거론된다. 그러나 부흥회를 거치면서 비정치화되고 일제에 협력하면서 외형 성장과 물질주의로 경도되는 현실 도피적・비민족적 교회가 된 부정적 결과도 발생했다. 김용복, 서남동 등 1세대에 이어 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평양 부흥을 보수주의의 뿌리로 보고 한국전쟁과 유신체제를 거치면서 힘 숭배, 성장주의, 배타적 도덕주의, 친미, 반공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후자의 해석은 1907-10년이나 1911-23년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결여되어 있다. 1907년에서 중간 과정의 역사를 생략하고 바로 해방 후로 비약해서 건너뛰면 곤란하다. 

평양 부흥에는 비정치화(식민화)와 정치화(민족화) 운동이 혼재했고 아직 분화하지 않았다. 앞의 (2-A) 관점, 즉 한국인에 의한 부흥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결합에 주목해야 한다. 1907년도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예수교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와 논평을 계속 볼 수 있다. 1월 부흥 후 동경 유학생들이 조국을 위해 단지 동맹을 하자 평양 교인들은 의연금을 모아 보냈고, 선천의 신성중학교는 사범 과정을 개설하여 초등학교 교사를 배출해 평북 지역 국권회복 교육운동을 지원했으며, 평양의 7세 어린이가 국권 회복 연설 후에 나라를 위해서 3일 간 금식을 하자, 이를 성신 감화의 결과로 보도했다.(2월 19일) 신보는 부흥을 통해 국권 회복의 기초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했다.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황성신문」은 예수교인들의 의연금 참여와 인천 기독교인 부녀자들이 부흥운동 후 단연회(斷煙會)에 이어 국미적성회(鞠美積誠會)를 조직해 성미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을 칭송했다. 부흥이 진행되던 의주에서는 부자 교인들도 보상운동에 참여하자 신문은 신학문을 하는 예수교라야 유익하다고 칭찬했다. 기독교가 급성장하던 재령읍에서는 800가구 중 100가구가 신문과 잡지를 구독했고, 네 개의 학교를 세웠으며, 수천 원에 달하는 의연금을 내놓았다. 당시 군 병정 초봉 월급이 3원 45전이었으므로 현재 돈으로 하면 수 억 원을 헌금한 셈이다. 

사실 평양의 최대 문제는 일제에 의한 토지와 주택의 강점이었다. 평양역 주변의 광대한 토지가 군용지로 차압당해 수천 명이 농지와 주택을 잃었고, 남문밖장로교회도 부지를 잃었다. 1907년 초에는 평양 강동군과 상원군 일대에 안동(현 단동) 영사관 자작 오카베(岡部三郎) 영사가 목축장 건설안을 발표했다. 방대한 부지 안에는 교회만 15개가 있었다. 수만 명이 집을 잃고 수만 개의 묘지가 사라질 처지에 놓이자 주민들은 항의운동에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비정치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단선적 해석에 불과하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때 신비파 남감리회 선교사들과 서울의 문명파 선교사들이 일시 결합했지만, 일제 총독부는 한국인 교인들을 정치 집단으로 보았다.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해 서북 교회를 핍박한 것은 부흥운동이 가장 강했던 그 지역의 교회가 정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령도 서북의 선교 학교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 결과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1919년까지 쇠퇴했다. 다만 만주로 간 이동휘처럼 부흥과 민족운동이 결합된 기독교는 간도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세대주의 종말론이 들어오고 근본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비정치화되는 흐름도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따라서 1919년까지 교회가 비정치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비정치화로 간 부흥운동과 대비하여 3・1운동에 참여한 결과 1920년대 초에 교회가 성장했다는 해석은, (1)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북감리회가 1920년대에 쇠퇴한 이유, (2) 참여하지 않은 천주교나 소극적으로 참여한 불교의 성장 이유, (3) 소극 참여한 남감리회의 소폭 성장, (4) 적극 참여한 북장로회의 급성장, (5) 3・1운동에 반대한 조합교회의 몰락, (6) 적극 참여한 동학의 쇠퇴 등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들 여러 집단 중 북장로회의 급성장에는 3・1운동 참여 여부가 아니라 다른 요인 곧 김익두의 부흥운동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1920-23년 통계에서 한국교회 전체가 성장한 점만 보면 3・1운동의 결과로 오해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더 이야기하겠다. 


| 자료의 문제 
앞에서도 약간 언급한 1차 자료 문제를 토론해보자. 지금까지 평양 부흥의 역사는 주로 (1) 선교사 자료, (2) 장로교회 자료, (3) 평양과 서울의 자료, (4) 남성의 자료로 구성되었다. 자료 비평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국인의 자료, 감리회를 포함한 다양한 교파와 교회 밖의 자료, 여러 지역의 자료, 여성의 자료를 발굴하고 해석 방법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평양 부흥에 대해 현존하는 1차 자료의 대부분은 선교사가 쓴 글이다. 따라서 그 글이 어떤 삶의 정황에서 어떤 의도로 쓴 글인지 행간을 읽는 자료 비평과 해석이 필요하다. 

첫째, 선교사 서신: 1907년 1월 초에 시작된 장대현교회 도사경회만 보아도 선교사, 날짜, 지역, 성별에 따라 부흥 서술에 유사성과 차이점이 발견된다. 이후 부흥의 발전도 마찬가지로 성별, 지역별, 계층별 등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부에 보낸 편지와 달리 동창회나 친구, 가족에게 보낸 서신은 좀 더 사적이므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선교사의 일기: 서신이나 보고서에서 침묵하는 선교사들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현재 알려진 일기는 평양 숭실대학의 감리회 목사 베커와 북감리회 노블 부인의 일기이다. 특히 베커의 자료는 숭실대 학생들의 동성애 회개까지 언급한다. 

셋째, 선교 잡지: 선교회 공의회의 기관지인 Korea Mission Field에 1907년 1월호부터 발표된 글은 자연히 선교사들의 의제–불신자의 개종, 서구 기독교적 문명화와 계몽, 교회의 갱신과 정화(비정치화)를 통한 교회 보호와 성장–에 도움이 되도록 편집되었다. 특히 1월호 자료는 별지로 인쇄해서 전국 선교사들에게 나누어주고 평양 부흥이 재현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평양의 한국인 교인들뿐만 아니라 이 문서들의 영향도 주목해야 한다. 한편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수많은 해외 기독교 지도자들의 여행기도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많이 출판되었는데, 해외에서 평양 부흥과 한국 선교가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보여준다. 

넷째, 1908-10년 미국에서 출판된 소책자나 책은 대개 선교기금 모금용이었으므로, 평양 부흥을 재구성하여 활용했다. 따라서 선전용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면 곤란하다. 현재 한국에 나와 있는 부흥 역사 서술은 이들 소책자를 액면 그대로, 자료 비평 없이 각 자료의 가치를 동등하게 보고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다. 1차 자료도 각각 그 무게가 다르다. 예를 들면 인천의 존스(G. H. Jones)와 평양의 노블(W. Noble)이 공저한 Religious Awakening of Korea(뉴욕, 북감리회해외선교부, 1908)는 축약본 The Korean Revival(뉴욕, 북감리회해외선교부, 1910)로 출간되었다. 후자는 한국 선교 25주년 모금운동용으로 출판되었다. 책 제목도 더 익숙한 부흥으로 바꾸고, 본문에는 소제목을 달고 사진도 넣어 가독성을 높였다. 두 책은 모두 평양 부흥을 선교의 성공 사례로 제시하고, 학교 기금을 위해 학생들의 개종과 회개 사례를 강조했다. 북감리회는 교육에 치중하되 자급의 원리가 약했기 때문에 많은 기금이 필요했는데, 부흥은 모금의 기회를 제공했다. 

존스와 노블의 소책자는 감리회 부흥을 서술하므로, 기존 장로회 중심 평양 부흥사를 수정,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수정판이 1908년 초판을 줄일 때 생략한 부분에 주목하면 수정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초판의 첫 페이지에서 선교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교사들이 시작한 원산 부흥과 1906년 평양 선교사들의 부흥을 위한 기도 부분을 생략했다. 이를 통해 1907년 부흥이 전적으로 성령의 개입 결과이며, 따라서 여러 지역 교회의 부흥이 독자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즉 인위성보다 초월성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1907년 초 감리교 안에 있던 한국인 목회자와 지도자들의 “뿌리 깊고 강렬한 적대감” 부분도 제거했다. 한국인들이 죄를 고백하면 출교를 당할까 우려한 점, 부흥사들이 오는 것을 막은 일, 남산현교회 1,700명 교인과 이은성 목사가 1월과 2월 초까지 완강하게 부흥회를 반대한 점 등을 생략했다. 1908년 판에서도 한국인 목회자들의 반대 이유를 밝히지 않았는데, 2판은 반대 부분을 거의 생략했다.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다섯째, 북장로회는 감리회와 달리 1907년 1월 평양 부흥 현장에 있었던 블레어(William Newton Blair, 방위량)가 3년 후에 소책자 The Korea Pentecost를 발표했다.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오순절’ 용어 사용에 있다. 그러나 평양 부흥이 당시 오순절파 운동과 상관이 있거나, 방언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오순절’ 용어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책 10장에 나오는 평양 부흥 서술에도 방언은 등장하지 않는다. 후대 학자들은 블레어의 오순절 용어에 주목하고, 당연히 방언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블레어는 첫해 어학교사를 통해 어렵게 외국어(방언)인 한국어를 천천히 하나씩 배웠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모르는 언어를 갑자기 말하는 기적적인 능력이 아니지만, 나는 방언의 은사를 믿게 되었다.”(19쪽) 부흥을 뜨겁게 소개한 방위량, 그가 말한 ‘방언의 은사’란 바로 선교사면 누구나 거쳤던 한국어 5년 과정을 통해 시험을 치면서 천천히 배운 은사였다. 

일부 역사가나 오순절 신학자들이 게일의 Korea in Transition(1909) 216쪽을 인용하여 1907년 전후 대부흥 때 방언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본문의 문학적 표현을 오독한 결과이다. 평양 부흥 소식을 듣고 만주 기독교인들이 평양을 방문하고, 길선주 목사와 다른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도했다. 중국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단음절어로 기도하고, 한국인들은 세상이 잊어버린 고대 언어로 기도했다.” 곧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기도했고, 한국인들은 평양의 고대어인 평양 사투리 한국어로 기도했다는 뜻이다. 사실 당시 선교사나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 중에 방언을 체험한 자는 없었다.(기록상 한국교회 첫 방언은 1931년 이용도 목사 집회 때 있었다.) 

반면 평양 부흥 당시 신유 혹은 축귀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있었다. 김익두는 1903-06년 신학교 재학 때 벌써 신유의 은사를 받아 기도로 병을 고쳤다. 따라서 번하이젤 목사 같은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은사 중지론자로 교육을 받고 그렇게 가르치다가, 평양 부흥을 겪은 후 은사 지속론자로 변했다. 

이 밖에 한국인의 자료와 여성의 글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신학월보」에 있는 한글 자료는 한국인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그리스도신문」 1907년 1-5월 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아 평양 부흥에 대한 한국인의 체험을 알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여성의 숨은 목소리 발굴과 정리는 향후 평양 부흥사 연구에서 가장 힘써야 할 분야이다. 

신약젼셔, 1907

이상에서 평양 부흥에 대한 해석 문제와 자료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평양 부흥은 100주년 때 이용하고 일회용 컵처럼 용도 폐기할 사건도 아니며, 이미 연구가 끝난 사건도 아니다. 평양 부흥을 새롭게 연구하고 정리하고 사모할 때, 한국교회는 부흥의 불씨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