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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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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한국 천주교의 신사참배와 전쟁 지지 1932년 마침내 일본 천주교회는 동경 대주교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애국심과 충성을 드러내는 시민적 예식인지에 관해 아니면 신도의 종교의례인지 문부대신에게 정식 회답을 요구하게 하였다. 문부대신은 차관을 통해 신사참배는 시민적 예식 외에 별다른 것이 아님을 통고하였고, 일본 주교들은 이에 근거하여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허락하였다. 일본 주교들의 결정을 근거로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은 신사 참배를 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고, 그 사실을 주일(駐日)로마 교황 대사관에 통고하였다. 이에 교황사절 마렐라(Marella)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감상(感想)"이라는 서한을 통해 교황청의 통고를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거의 모든 성직자..
1930 한국교회 부패상 {조신일 목사의 글, 1930년] 당시 한국교회 부패상"아, 성령의 불이 떠난 오늘의 교회는 마치 불타고 남은 빈 터와 같이 검등과 숫덩어리뿐입니다. 목사가 작첩을 한다. 예배당 쟁탈전을 한다. 예배당 안에서 노호질책을 한다. 피를 흘리는 참극까지 있어 교회에 내정이 부패하기 짝이 없습니다. 내정이 이처럼 부패한 교회가 밖으로 무슨 연장할 세력이 있겠습니까? 큰 목소리로는 공기를 진동할 뿐이요 주먹으로는 강단을 깨칠 뿐이지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이 악마의 철옹성을 깨트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위선자라 아편이라 하여도 아니라고 할 그 무엇이 없습니다."
1934 한국 교회 쇠퇴 4대 요인 1934년 초 한국 장로교회와 선교회들이 선교 5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기독신보』는 김택민의 “통계로 본 한국 교회”를 8회 연재했다.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선교 희년 대회에 총력을 기울이고 50년 간 성장한 교세와 교회가 사회에 공헌한 것을 자랑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성찰을 이어 1930년대 초반에도 김택민과 같은 여러 예언자적 비판이 있었다. ​그는 여러 통계 수치를 통해서 일단 교회가 수적(입교인, 헌금액 등)으로나 질적으로(목회자 교육 수준 등) 성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성장 과정에서 대위기가 발생했으며 그 위기는 다음 네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이후 위기 상황과 유사하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성경 신앙이 아닌 강단 신앙(講壇 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