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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이런 게 인생

[이런 게 인생] 3,000 대 3

온누리교회에서 중등부 전도사로 3년, 전임 전도사로 1년을 봉사했다. 중등부는 학생이 수십 명에서 200명 정도로 늘었고, 교인은 수 백 명에서 3,000명으로 늘었다. 셋째까지 태어나고 석사 공부에 전임 일까지 과부하가 걸린 나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사임했다. 서울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원에도, 두레에도 있을 곳이 없었다. 탈서울하여, 아는 사람이 없는 거창읍에 무작정 내려가서 연립주택에 1년 세를 얻었다. 10층 옥상에서 1층으로 이사하니 편했다.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동의했다. 그러나 1월에 무슨 선생 자리가 있겠는가?

얼마 떨어진 작은 마을에 한 때 교인이 100명이나 되던 교회가 이농으로 사람이 다 떠나고 예배당만 텅 비어 있었다. 거창고등학교 부탁으로 그 교회를 맡기로 하고 무보수로 1년 간 예배를 인도했다. 교인은 할머니 두 분, 내 식구 다섯 명이었다. 3,000명 교회 예배보다 마음이 편했다. 곧 아주머니 한 분이 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담임(?) 목회였다.

할머니들은 내 어린 아이 셋을 사랑해 주시고 주일마다 유정란 계란을 10개 정도 주시고, 그 동네에 있는 택시를 불러 주어 왕복할 수 있게 했다. 나는 택시비 + 계란 10개 가치를 헌금했다. 아이들은 시골에서 잘 자랐고, 나는 석사 논문을 쓰고, 목사 안수를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유학 준비를 해서 미국으로 왔다.

떠나기 얼마 전 할머니들이 돈을 모아 교회 내부를 정갈하게 꾸몄다. 커텐도 갈았다. 하나님께 미안했다며....

곧 그 동네에 사진처럼 감자 꽃이 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