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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코로나 사태와 한국 교회

1918년 10월 한 달 서울 종로 유행성독감 피해는?

1918년 10월 종로경찰서 조사에 따르면 한 달 동안 스페인독감 환자 확진자는 2만 6천 명이 넘었다. 당시 위생은 경찰 업무였다.

일본인 2,600명, 한국인 2,4000명, 계 26,600 여 명 ("종로관내만 2만 6천: 기막히게 많은 독감의 환자수," <每日申報>, 1918년 10월 31일)

사망자는 일본인 10명, 한국인 138명으로 대부분 어린이나 노인이 죽었다. 일본인의 치사율은 0.38%, 한국인은 0.58%로 일본인이 좀 더 치료를 잘 받아 치사율이 낮았다. ("朝鮮人에 死亡者가 많은 이유는 치료를 잘 못하는 까닭이다," <매일신보>, 1918년 11월 3일)

10-11월에 일본, 중국, 한국에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다. 서울 감염자를 조사해 보니 하류층과 노인층이 많았다. ("京城에 毒感으로 死亡한 사람을 조사하여 본 즉 조선사람에는 하류에 제일 많다," <每日申報>, 1918년 11월 12일)

부산에 상륙한 독감은 10월부터 맹위를 떨쳐 이듬해 초까지 유행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인구의 0.83%)이 희생되었다. (<경무휘보(警務彙報)>, 1920년 3월호)

사람들은 독감을 '풍사의 귀신'(風邪의 鬼神)으로 불렀는데, 그것을 그때처럼 스페니쉬 인풀루엔자나 스페인독감으로 부르거나, 지금처럼 Covid-19이나 Corona-19으로 부르는 것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알지 못했지만, 지금처럼 그 바이러스를 신문에서 대문짝만 하게 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귀신 때문이라고 하든지 보이지 않는 미균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하든지, 두렵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다. 보지 않고 믿는 세상이나, 보고 믿지 않는 세상이나 무엇이 다른가?

만주에서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멍석말이를 했는데, 한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장례식도 없이 쓸쓸이 죽어가는 노인들이 일종의 멍석말이를 당하고 화장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다른가?

<매일신보>, 1918년 10월 31일
"유행독감 모조리 멍석말이," <매일신보>, 1918년 1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