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필림(Nephilim: "sons of God")은 거인, 신의 자손, 영웅, 유명인, 권력자, 거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홍수 전 창세기 6장 2절에 처음 나오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에 보낸 12명의 정탐꾼 보고에도 나온다. 네피림인 아낙 자손들을 본 10명의 스파이들은 스스로 ‘메뚜기’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고 벌벌 떨었다. (민수기 13장)
창조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 때 다른 피조물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서 지었다. 미드라쉬 해석에 따르면 세상 사방에서 가져 온 흙에 예루살렘 성전 자리의 흙을 섞은 후 물을 부어 반죽을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은 어느 곳에 묻혀도 된다. 그리고 그 몸의 물은 결국 구름이 되어 또 세상 사방에 뿌려지게 된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듯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 듯이 빚으신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되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당신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자식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복의 명령을 주었다.
인류 시작 단계이므로 중요한 것은 자손을 많이 낳아 인구가 증가하고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홀로’ 一者로 계시지 않고 인간을 만들고 다양한 多數 인간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기로 하셨다. 그래서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 작가와 작품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다. 때로는 작품이 작가를 이끌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본다. 거울에 때가 묻을 수도 있다. 상호 영향, 상호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관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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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의 등장
그러나 창세기 6장에 오면 땅에 ‘신의 자손’ 네피림이 등장한다. 거인들이었다. 미드라쉬 설명을 보면 그들은 목에 태양을 걸었고, 머리는 구름 위로 솟아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구름을 움직여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그들은 점차 강포하게 되었고 보통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빼앗고 사람의 딸들을 강탈했다. 한마디로 도처에 ‘괴물’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수평 확장 대신 과대한 수직 확장의 죄를 범했다. 시대의 영웅이 되어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며, 자기 분야에서(연극계, 문학계, 교회 등등에서)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했다. 그리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며 처녀들을 강간했다.
노아 홍수 당시에 지배자, 영웅, 유명인, 부자들이 혼인 첫날 밤 신부를 납치해서 초야권을 누리는 갑질을 했다. 가장 신성해야 할 첫날 밤 침실의 문지방을 넘지 못한 신부들이 무차별하게 폭행을 당했다. 강도/강간/간음이 만연했다.
거인에게 당하는 자들은 스스로 ‘메뚜기’ 신드롬에 빠져 쫄았고, 네피림의 손에 얼어 붙어 항거하지 못했다. 너무 수평적 차원에만 머물러 땅에서 기는 존재, 잠시 폴짝 뛰었다가 다시 기는 메뚜기처럼, 약간의 수직 상승을 위해 네피림 앞에 숨을 죽이고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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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심판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ba-yadayim) 작품인 토기가 엉망이 되자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고”(va-yenahem) 큰 물을 보내어 토기들을 녹여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했다. 거인들도 메뚜기도 다 함께 불량품 토기처럼 깨뜨림을 당했다.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아담 프로젝트’를 후회하시고 홍수를 보내어 무차별하게 아담들을 물로 해체하고 땅에서 쓸어버렸다. 창조 이전처럼 물이 땅을 덮어버리는 상태로 돌아가, 거짓말하는 인간의 말 대신 말하지 못하는 파도의 찬양을 받으셨다. 폭력적 소통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침묵의 시대가 새로운 창조를 준비했다.
성범죄, 제국주의적 욕망
본질적으로 성범죄/강간은 강도짓과 동일하다. 자아의 확장 욕구를 채우기 위해 타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정복하고 이용한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타인을 무시하는 무례가 잔인한 폭력으로 발전한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 관심, 배려, 친절, 사랑의 반대편에 내 자아의 팽창 욕구가 만드는 강간과 강도 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이 사라진 허무한 인간은 나(자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타인의 지혜와 경험을 대화와 경청을 통해 배우는 대신, 타인에게 내 의사만 전하거나 무차별적 지시나 강요를 하게 된다. 왜곡된 소통의 한 형태가 왜곡된 육체적 소통인 성범죄이다.
우리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과 강점을 비판하는 데는 민감하지만, 한국 남성의 제국주의적이고 잔인한 폭력인 성범죄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친일파에 대한 분노와 동일한 강도로 성 범죄자에 대한 분노가 없다면 위선자일 뿐이다.
한국의 문학, 연극, 영화, 사법, 종교 계 등 모든 곳에 폭력적인 남성의 갑질 성범죄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악이 만연해 있다.” 음담패설과 성희롱과 강간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고도 한국 사회가 심판을 당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이다.
대형교회의 욕망
대형교회 목사의 성범죄와 논문 표절과 횡령, 세습을 덮어주는 교회가 심판의 제1차 대상이 될 것이다. 왜 지난 30년간 300 여 교회가 세습이라는 영적 간음/강도짓을 했는가? 근본적으로 그들의 중대형 교회 프로젝트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허무주의적 불신앙이 만든 바벨탑 쌓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 없기에 자아의 확장, 자기 가족, 자기 교회가 신이 되어 그 번영만이 목표가 된 사업체를 만들고 그 기업체를 폭력적 방법으로 유지하려는 것뿐이다.
급성장과 확장이라는 제국주의적 영성은 타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없기에 거짓종교로 저주하고 혐오하고 배타주의와 정복주의 선교를 낳는다. 타문화를 폭력적으로 개종하려는 강간을 행하게 된다. 번영 속에서도 가난한 자에게 냉담하게 된다. 세월호 사건처럼 애매하게 고난을 당한 영혼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무감각하게 설교하게 된다. 바벨탑과 같은 이단과 교회를 세우면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강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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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에서 저항으로
메뚜기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똑 바로 서는 자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때 네피림에 이길 수 있다. 여호수아처럼 거인들 = 우리의 밥으로 보는 자세이다. 거인의 부당한 폭력에 대항해서 일어서는 자세, “더 이상 굴종하지 않겠다.”는 자세, 더 이상 메뚜기, 동물처럼 기는 자세로만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두 발로 땅에서 함께 일어설 때(=사람으로 살 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아비바 존버그는 하나님 앞에 일어선다는 것은 서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춤추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경직성(rigidity)과 혼돈(chaos) 사이에서 춤추는 존재이다. 신학도 이 둘 사이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 한국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춤을 배워서 조금씩 스텝을 밟으면 좋겠다. 나만 홀로 서서 의로운 척 하거나, 400년 전 춤만 추지 말고,오늘 이 땅에서 고통하는 땅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는 날이 오기를....
순응과 굴종을 강요하는 골리앗을 치는 물매돌을 던지려면 저항의 리듬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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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28 옥성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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