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밖 모화관 부근
1919년 10월 서대문 부근 김병찬의 자택에서 20여 명의 소년 고아들을 돌보는 고아원이 설립되었다. 오긍선과 윤치호를 중심으로 경성고아구제회가 발기되고(1920.1)→경성고아구제회 조직(1920.2)→경성고아원 개원식(1921.5)→재단법인 경성보육원 인가(1922.5)→안양분원 설치(1936.9)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대표적인 사회사업 기관으로 성장했다. (참고 한규무, "경성보육원의 설립과 운영 (1919-1945)," <향토서울> 79호 (2011년 10월), 209-242.)
경성고아원 혹은 경성보육원(Seoul Boys' House)으로 불렸다.
1920년 미국 적십자사 조선지부가 고아들에게 옷을 제공하고 사진을 찍었다. Korea Mission Field (April 1921), 안표지. 뒷줄에 윤치호가 서 있다.
고아원은 정부, 적십자사,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기독교인 독지가들이 도왔다.
1925년 전후 직조부서를 만들어 직조기로 옷감을 짜서 자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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