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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40s

1943. 12. 29 성결교회 해산

1943년 12월 29일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해산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미 기독교 색채를 제거하고 일본적인 기독교로 재출발하려고 했으나,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가 근본적으로 일본 천황제 국체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해산한다고 발표했다. 즉 성결교의 사중복음 중 재림 교리가 일본 국체와 상반되고, 유일신론이 천황숭배와 배치되기 때문에, 전시하에서 황민으로 충성하기 위해서 교단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1936년 교권파가 교단의 실권을 잡고 개혁파를 제거한 결과였다. 1938년 신사참배의 죄가 가볍지 않았지만, 1939년 기독교 교단 중 가장 앞장 서서 정신총동원성결연맹을 조직하고 제2차중일전쟁을 지지하고 나아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기독교의 근본 교리까지 부정하는 중죄를 지었다.

35년 전 12월 29일 성결교회는 신사참배보다 더 중한 죄인 유일신앙을 버렸고 재림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해체했다. 교권파가 헌법을 무시하고 총회를 장악하고 해산한 후, 임원 중심의 이사회가 교단을 운영한 결과였다.

이명직은 창씨개명하여 牧野明稙 마키노 메이쇼쿠가 되어, 1938년 이세 신궁에 참배했다. 

1943년 12월 이명직을 필두로 성결교 지도자 7인은 성경이 그 기본을 유대 사상에 두어 국체에 반하는 치명적 결함이 있으므로 성서 자체로부터 이탈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성결교회 해체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를 일제 탄압 때문이다. 3.1운동을 계승한 저항운동이라고 견강부회하는 해석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행위였다.

아래 그 원문을 소개한다. 성결교회는 매년 12월 29일 대참회의 날로 삼아 금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해방이 되고 10월에 성결교회는 부활 총회를 열었다. 그러나 철저한 회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