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40s

1940-45 임정의 참전과 승인 문제: 김구와 이승만 노선의 대결?

일부에서 김구의 중칭 임정을 깎아내리기 위해 광복군을 비하하는 듯한 글을 쓴다. 참전을 미루었기 때문에 해방 정국에서 임정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높힌다.

참고, 이영진,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0442?fbclid=IwAR0hGzrjeW6nHQnCZFBsOwru_J1JZtpg955EtgXuRgXjQDVSMUxz60uerIA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임시 정부' vs '임시정부' '임시'라는 말은 명확한 기한을 정하지 않은 잠시 동안의 상태를 이르는 명사이다. '정부'라는 단어와 함께 쓸 때는 둘 다 명사이므로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 그 임시 정부가 어떤 고유성을 띨 때에 한해 '임시정부'라 붙여 써도 마땅할 것이다. 이 글은 이 문법적 고려를 가해 쓴 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

www.christiantoday.co.kr

그러나 그런 대조를 통해 이승만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이승만은 당시 임정의 일부로서 협력하고 있었다. 그의 외교 노력의 절정인 1942년 3월 1일 전후 워싱턴디시의 "자유한인대회"는 선전 효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길게 써야 논증이 되겠지만, 간단히 쓴다. 관심있는 이들은 아래 책 두 권 등 여러 자료를 보기 바란다. 

1940-45년 당시 미국이 이미 한국을 신탁 통치하기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미국으로부터 정부로서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과정에서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한국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으로 조직되었다. (아래는 위키에서 가져왔다.)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한국 광복군, 30명 중 여군 4명도 보인다.

"그러나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와 굴욕을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하달받았다.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하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 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이 선전 포고는 일본 측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국제법의 효력은 없었다)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45년 4월 당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고 한다."

호서대 이영진 교수의 주장대로라면 30-340명의 군인이 참전하여 용감하게 전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의 통제 하에 있고, 그런 소규모 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참전하여 전사했다면, 과연 임정이 정부로서 인정을 받았을까? 1944년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한국을 20-40년 정도 신탁 통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임정을 인정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소련이 북한 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갔기 때문에, 남한에서도 1948년 단정이 수립된다. 준비 없이 빨리 정부가 서는 과정에서 제주 4.3사건도 발생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승만의 외교 활동으로도, 김구의 노력으로도 중칭 임정은 미국이나 중국으로부터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군의 참전 여부가 큰 변수가 아니었다. 사실 1943년부터 광복군은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임정을 인정하도록 할 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다. 이승만도 김구도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올 수밖에 없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m Com. 회장 김호) 조직 직후에 3일간 열린 자유한인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참석한 이승만과 민덕순.
자유한인대회는 임정의  승인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여러 정보를 통해 평가한 후 거절했다. 이후 이승만은 한미협회(Korean American Council) 회장 크롬웰을 통해 국무장관을 접촉하여 임정에게 무기 대여, 재정 원조를 구했으나 실패했다. 미국, 중국, 소련은 자기들의 지분을 더 차지하기 위해 누구도 임정을 인정할 마음이 없었다.  

임정의 활동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게 최선이었다. 중국 여러 도시를 전전했던 임정을 비판한다고 해서 이승만이 올라가는 게 아니다. 가난한 살림으로 꾸려간 임정 요원들과 젊음을 불태운 광복군을 제대로 평가해 주어야 한다.

참고한 서적: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 정책>, 재판 2013; 박지향 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