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40s

1949년 반민자 재판 지지부진

이 한 장의 사진: 1949년 4월 4일자 <주간 서울>

https://www.facebook.com/designersparty/photos/a.756143587762860/1244138862296661/?type=3&theater

70년 전 반민자 재판

해방 후 3년 간 미 군정은 반민족 친일파에 대해 "너희 일은 너희가 처리하라"는 말로 처벌을 미루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곧 특별법이 마련되어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1949년 1월부터 재판에 들어갔으나, 보도처럼 정의 실현은 지연되고 있었다.

평가

1912년 일제 식민지 하 첫 대 공판인 105인 사건 때는 선교사들이 적극 노력하여 법정 정의를 이루어내고 105인 중 99인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 민족 정기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친일 민족반역자 공판에서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냉전시대 국제정치 상 더 큰 적인 공산주의가 북에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한 신생 정부의 생존 자체가 더 문제였다. 실제로 1년 후 전쟁이 터졌다. 

일제 식민지로 한 번 왜곡된 후, 북한 공산주의로 다시 왜곡된 남한 정치 하에서 기독교는 이후 70년 간 비정상적인 궤적을 그린다.

1912년에는 기소된 한국인들은 고문으로 거짓 고백을 강요당했으나, 법정에서 진실한 교인, 애국적 지사, 신교육 지성인으로 판명되어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삼일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소되는 목사들은 거짓말 신자, 이기적 천민, 가짜 학력에 표절 학위자로 욕을 먹고 있다. 그래도 뻔뻔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개신교는 1910년 대한 정부의 무핍박 시대에서 총독부의 핍박 시대로 가자 반일운동에 참여한다. 천주교는 반면 100년 핍박 시대가 끝났으므로 친정부로 갔다. 동일하게 1945년 이후 개신교는 10년 핍박이 끝나자 친정부 반공으로 가면서 정부와 혼연일체 되었다. 그 결과 사법정의나 사회정의에서 멀어졌다. 천주교는 어정쩡하게 있다가 유신 시절 반정부 민주화운동으로 반전에 성공했다. 바티칸의 지지가 있었기 떄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