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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00s

"문명 개량 진보"의 120년

1907년 8월 13일 도쿄에 있던 전 내무대신 유길준은 이토 통치 하의 대한제국이 새 내각(총리 김윤식)을 구성하고, 자신을 내무대신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준비했다. 떠나기 전 그는 전 일본 내무대신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를 만나 정책 조언을 구했다. "자유민권운동가" 이타가끼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인민을 문명화하여 부강에 이르는 것이 상책이듯이. 조선도 일본의 동양 평화론[일본을 리더로 삼아, 곧 한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 백인의 제국주의를 막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동아주의]에 동참하여, 인민을 먼저 문명화시키는 개량 진보책을 채택하라고 충고했다.

지난 120년 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과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독립은 시기상조이니,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이어서 미국-일본의 냉전 체제 하에 협조하고, 그 안에서 일본과 미국의 tutoring을 받아 문명개화와 근대화를 통한 진보를 이루라는 논리였다. 강자가 말하는 자유와 민권과 진보란 바로 그런 것이었던가?  

원문대로 치면 아래와 같다.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본 대판매일신보 역등) 곧 귀국할 유길준 씨가 백작 판원퇴조(이타가키 타이스케)1) 씨를 방문하고 한국의 정책을 물으니, 백작이 말하여 왈,전날에 인도인이 나를 내방하여 영국의 압박을 면할 일을 말하기에, 나는 ‘인도인이 러시아 국이나 기타 국에 통하여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함은 그 책이 아니니, 국민을 문명에 이르도록 부강의 도를 배움이 인도인의 급무라. 대저 국민 지식의 진보와 국토 부력의 증가가 독립의 대 원인이라.’ 하였으니, 나는 귀하에게도 이 말로 정함이 적당하도다. 일본이 러시아와 칼과 창을 교환함도 동양 영원의 평화를 공고코자 함이요, 그[러일전쟁] 후에 귀국과 협약을 체결하여 보호하기에 이름도 동양의 평화와 문명을 위함이니, 귀국도 폐방의 정신을 살펴서 경거망동치 아니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구미인이 일본의 문명을 평하여 왈 ‘하의가 없는 플로어 코트를 착용함과 같이 표면은 문명을 장식하였으나 이면은 야만의 풍습을 미탈함이라고 조소한 즉, 우리는 그 하의를 만들고자 하여 사회 개량을 진력하는 중이니, 귀하도 귀국하신 후에 사회 하층에 유념하여 개량 진보를 힘쓰기를 바라노라.하였다더라.

----1) 板垣退助 Itagaki Taisuke (18371919) a leader of the Freedom and People's Rights Movement (自由民権運動 Jiyū Minken Undō). In April 1896, Itagaki joined the second Itō administration as Home Minister. In 1898, Itagaki joined with Ōkuma Shigenobu of the Shimpotō to form the Kenseitō, and Japan's first party government. Ōkuma became Prime Minister, and Itagaki continued serving as Home Minister. Itagaki retired from public life in 1900 and spent the rest of his days writing.

유길준과 이타가키

이에 대해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문>은 전 군부대신 조희연, 전 내무대신 유길준 등 망명객이 친일 노선에 서고, 한국인의 의병 운동을 독립운동이 아닌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불만으로 보는 것을 비판했다.  

12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일본은 다시 1등 미국, 2등 일본, 3등 한국이라는 문명 서열을 강조하고 있다. 서열의식에 사로잡힌 일본과 보다 창조적이고 평등 의식이 강한 한국의 대결이다. 120년 전 1900-10년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동아주의에 설득 당했다. 문명 발전 단계론(국가 서열론)을 수용하고, 한국을 반개화나 미개한 나라로 보았던 이완용, 유길준, 윤치호 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어쩔 수 없는 일로 수용하고, 1919년 삼일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론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야만"이라고 깔보았던 대한의 "사회 하층"은 비폭력으로 "만세 소요"에 참여하고 정의와 자유와 평화와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  

2019년, 백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묻는다. 3등은 영원한 3등인가? 1-2-3등은 누구의 관점인가? 무엇이 한 나라를 문명국으로 만드는가? 돈과 힘인가? 자유와 평등인가? 누가 참 진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