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대/1900s

바로 잡은 민영환 사진

민영환 충정공이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사진으로 1904년 6월 출판된 잡지에 나오므로 1904년 초에 촬영한 듯하다.

자결 전 1904년 사진 (잡지 수록 1904년 6월)

이와 유사한 다음 사진이 위키백과에 나온다. 아마 같은 날 같은 사진관에서 촬영했을 듯. 무인의 모습이 강하게 풍긴다.

민영환 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

그런데 다음과 같이 알려진 사진이 있다. 위의 두 사진에 비추어 보면 좌우 방향이 바뀌었다. 

위의 첫 사진에 비추어 이 사진은 다음과 같이 좌우를 바꾸어야 하고 촬영시기도 1904년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이 모습이 바른 방향이다.

1905년 대한제국이 외교자결권을 상실한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 11월 30일)은 자결했다. 언더우드 부인(Mrs. Lillias H. Underwood)은 사익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공의를 위해 살다가 자결한 의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애국 자결에 죄라는 말은 당시에 도무지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기회주의적이고 돈을 사랑하고 양심이 없는 관리층 가운데, 그는 놀라울 정도로 正道를 고수했다. 백성에게 봉사하고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그의 첫 번째 목적이었고,그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 그는 자신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라나 교회를 위한 순국이나 순교는 모두 큰 사랑의 행동이다. 작은 사랑을 실천해 온 자만이 최후에 큰 사랑을 할 수 있다. 일관성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그 큰 사랑은 작은 사랑을 축적해 온 자만 할 수 있는 의무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