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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00s

신갈교회 창립은 1901년 11월

<웨슬리언타임즈>, 2020. 7. 14를 보면 교회가 1900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일을 알 수 없어 교회가 임의로 3월 1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제18회 북감리회 한국선교회 연례회의에서  이천 구역 담당 선교사 스웨러(Wilbur C. Swearer)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 So Ko-ji" 항목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01년 11월 소고지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902년 봄 현재 학습인 27명, 세례교인 5명이었고, 곧 예배당 용도 집을 구입할 것이라고 했으므로, 이 말과 다음 몇 자료에 근거해서 소고지교회(신갈교회)는 1901년 11월 설립되었다고 하겠다.

W. C. Swearer, "Report V. Su-won, Ichon and Kong-chu Circuit," Official Minutes of the Eighteenth Annual Meeting,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Pyeng-Yang, Korea, 1902 (), p. 51.

 

소고지 구역은 이천 계삭회에 속했다. <신학월보> 1902년 5월호 "이천 계삭회" 기사는 소고지를 "쇽고지"로 언급했다. 

"소고지교회"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곳은 <신학월보> 1902년 11월호이다. 이때 예배당을 위해 500량을 연보했는데, 그 돈으로 먼저 재목을 사고, 공사비를 위해서 더 연보할 예정이었다.

문경호, "교보, 열심으로 례배당을 지음," <신학월보> (1902. 11): 541.

이상의 보고서와 기사를 종합할 때, 소고지교회(신길교회)는 1901년 11월에 설립되어 1902년 6월 경에 한옥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연보하여 재목을 마련하고 11월 경에 수리,확장에 들어갔다고 하겠다.

참고로, 1901년 초 경기도 지역에 교회가 흥왕한 이유 중에 하나는 대가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901-1902년 두 해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흉년이 들면서 1901년 초가 되면 '쌀 신자'와 가짜 신자들이 속출하고 곳곳에 교회당이 들어서고 십자기를 걸고 작당하여 교폐를 행하는 자들이 많았다. 기후 변화로 생존을 모색하던 농민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부패한 지방 관리들로부터 재산과 생명을 지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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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갈교회] 이천 남부지역 복음화의 교두보로 120년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남이천 I.C로 빠져나가 우회전하여 약 5분 달리면 왼쪽 야트막한 언덕에 뾰족이 얼굴을 내민 십자가를 볼 수 있다. 120년 전에 심겨진 복음이 세월의 무상과 함께 피고 진 민족의 애환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지역교회로 자리잡은 신갈교회를 찾았다.

며칠 전 허리를 다쳐 5분 이상 앉아 있는 것이 힘들다는 양희철 목사님과 마주앉아 교회 역사를 듣는 동안 시간이 1시간 40분이나 흘렀다. 알고 보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양 목사님과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기자의 만남이었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이다. 적어도 기자에게는 역사에 대해 나누는 순간이 흥분되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 황홀감으로 이천에 깃든 감리교회의 기운을 따라 가 보자.

복음의 전래 과정은 길(way)에 있다.
복음의 전래 과정은 길과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길은 곧 사람과 문물, 그 모든 것의 흐름이자 통로이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도가 놓이기 전 서울과 충청도를 잇는 길목으로 세 갈래 길이 있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경기도 과천~시흥~수원~성환을 거쳐 천안~공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요, 한강나루를 건너 경기도 판교~용인~죽산을 거쳐 진천~청주~보은으로 이어지는 길이 두 번째이다. 마지막 세 번째 길은 송파나루를 건너 경기도 광주~이천~음죽을 거쳐 충주에 이르는 길이다. 이 세 갈래의 길 중에서 충주에 이르는 길목의 중심 포교 지역이 이천이었다.

1885년 제물포에서 시작된 개신교 선교는 지역의 중복으로 인한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물적,인적 낭비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1892년부터 선교지 분할에 대한 협정을 시작하여 1909년 9월 16일~17일에 최종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에서 이천지역은 감리교 선교지로 할당되었다.

경기도 이천과 광주지역 감리교회의 모교회는 덕들교회이다. 덕평교회로 불리기도 했던 이 교회는 이천에서 17㎞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1896년 박해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교회가 시작되었고, 2년 후 스웨어러(W. C. Sweaer) 선교사에게 온 가족이 세례 받은 것을 기점으로 성장하였다. 교인들이 스스로 헌금하여 1899년 서양식 예배당을 건축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천지역의 중심교회가 되었다. 이 무렵 인근 여러 곳에서 감리교회 신앙공동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민족 비사(悲史)에의 열정이 복음 전도의 열정으로  
한편, 1895년 10월 8일 일본의 만행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생들은 친일 역적을 처단하자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 의병을 규합했다. 고종이 각지의 유림들에게 의병 궐기를 촉구하는 밀서를 보냈고 충청도에서 문석봉이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더구나 그해 12월 30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민중들이 반발하면서 마침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를 건 의병 활동이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을미의병운동의 시작이었다.

이천 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이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구연영(구춘경)과 이천 군량지역의 유지였던 김제안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1899년 이천과 광주 지역의 세례 희망자들이 덕들교회에 모여 세례를 받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구연영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한창섭, 장춘명 등도 이 날 세례를 받았다.

세례 후 이들은 이천과 여주지역 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쪽복음을 들고 옛 의병 동지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 불과 2~3년 사이에 급속히 성장하였다. 1903년 스웨어러 선교사의 보고에 나오는 총교인수를 보면, 시흥순회구역이 162명, 수원순회구역이 127명인데 비해 이천순회구역은 무려 1,454명이었다.

이천 복음화의 상징적 인물이 된 구연영은 1897년 스스로 상동교회로 찾아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교회가 서민들의 피난처가 되어주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고 무장보다는 신앙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98년 상동교회에서 엡윗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펼쳤다.

대표적인 집회가 이천 장터에서 2천여 명이 모인 ‘예수교인 대회’였다. 대회를 마친 며칠 후 일본군이 그의 집을 급습하여 그와 아들 구정서 전도사를 체포하였다. 일본군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1907년 8월 24일 이천 장터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눈을 감고 기도하던 중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구연영과 함께 기독교인이 된 김제안은 존스 선교사의 전도장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그는 이천 일대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1899년부터 소고리, 신갈리, 원두리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였고 그 결과로 문경도, 최성현, 이창근, 김정래 등 8명을 신자로 얻는 결실을 맺었다. 그의 열심은 이듬해 예배당 설립으로도 이어졌는데, ‘돈이동(도리리) 소고지(소고리)’ 두 곳에 교회를 세웠다.

"리천읍 군들쇽쟝 김졔안씨ᄂᆞᆫ 본래 젼도쟝을 엇어보고 셩신도으심으로 회개한후 졈졈젼도하야 돈이동소고지 두곳 교회를 셜립하고 또 읍내에드러가 도를 열심히 젼파하야 여덟사람을 회개식히고 ... (중략) ... 열심히 전도하매 교회가 날로 흥왕하는 모양이니..."(대한그리스도인회보)

이때 소고지에 세워진 교회가 신갈교회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1900년 몇 월 며칠, 소고지의 어디에 예배당이 세워졌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희철 담임목사의 설명으로는 교회설립 날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교인들과 의논하여 3월 1일을 창립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준 기자의 마음도 아려왔다.

소고지에 예배당이 세워진 것은 좋았으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신갈리에 살고 있었기에 4km 이상 걸어서 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던 중 1917년 신갈리 517번지에 228평 기와 한옥집을 매입하면서 교회를 이전하였다.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서 있는 자리이며, 교육관은 ‘신갈예배당’이라는 주춧돌 위에 앉아 역사를 지켜가고 있다. 이처럼 예배당을 이전하면서 1918년부터 이천구역에서 갈산구역으로 독립하였다.

1917년부터 예배당으로 사용한 기와 한옥을 받쳤던 주춧돌 '신갈예배당'
1919년 일어난 삼일운동에서 기독교는 중심에 서 있었다. 교회의 역할과 활약이 없었다면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삼일운동 직후 일제로부터 받은 탄압으로 인해 많은 교회가 문을 닫아야 했고, 교인들도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화성 제암리교회와 수촌리에서 일어난 학살사건 외에도 많은 교회들이 수난을 당했다. 이 시기 신갈교회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37년에는 갈산구역에서 오천구역으로 편입되어 오천구역 김동욱 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제가 내세운 황민화정책에 부화뇌동 한 친일목회자들에 의해 1941년 3월 감리교회가 문을 닫고 혁신교단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교회들이 통폐합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는데 많은 농촌교회와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이천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신갈교회는 당시 장학성 목사(1943~1947.2)와 이성봉 유사(지금의 재정부장), 김일옥 탁사(지금의 관리부장), 백봉례 속장, 최간난 속장 등의 헌신으로 탄압을 이겨내며 교회를 꿋꿋이 지켰다.

교회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이런 일이 전해지고 있다. 1944년 겨울 모가면 주재소장(현재의 파출소장)이 교회 단상의 성화를 떼어내고 일본신상을 놓으라고 압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주재소장의 요구가 교회 문을 닫으라는 말과 다름 없다고 여긴 장학성 담임자와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거부하여 지켜냈다. 교회는 이런 선배들의 ‘순교의 각오’가 있었기에 오늘까지 그 역사를 이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해방 이후 교회는 안정을 찾는 듯 했으나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번 시련을 맞았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던 1952년 3월 18일 장량헌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열었고, 휴전협정으로 복구를 향해 땀 흘리던 때에 맞추어 교회도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주일학교를 비롯하여 청년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잿더미가 된 사회 곳곳에서 복구의 바람이 불때 신갈교회도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부흥한 교회는 기존의 예배당이 협소하여 1958년 교육관 부지에 터를 마련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당시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모든 비용은 변호덕 선교사의 소개로 알게 된 미국 안나프레스카 여사의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1960년대 들불처럼 일어난 '잘 살아보세 운동'(새마을운동)은 신갈교회에 또 한 번의 교회 건축을 요구하였다. 비록 리(里) 단위에 세워진 교회였지만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노력으로 인해 교세가 더욱 성장하였고 자연히 새 성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교인들의 열정어린 헌신과 헌금으로 1975년 3월 새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는 기쁨을 누렸다. 현재의 예배당은 이때 세워진 건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친 수리와 리모델링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1990년대 신갈교회는 모든 부분에서 부흥을 이루었다.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나아갔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선교에 있으므로 신갈교회도 그 사명을 다하였다. 특별히 지난 역사 동안 지역복음화의 기지 역할을 감당하여 신갈리 주민의 80~90%가 교회에 출석하는 결실을 맺었다.

지금도 마을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의 일정을 확인하고 일시를 잡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행사에 담임목사가 참석하여 축복기도를 하고서야 행사가 시작될 정도로 지역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렸다. 이는 국내 어디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복음화율이다. 또한 국내 비전교회에 선교비를 후원하고 해외선교에도 열심을 내어 중국 연길에 선교센터를, 아프리카 토고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2018년 10월 7일 26대 담임으로 부임한 양희철 목사를 지근거리에서 도우며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기도한다는 양경모 장로는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좋은 관계를 만들어 ‘신바람나는’ 목회를 통해 ‘신명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12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새로운 비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한 세기를 넘어 강산이 열 두 번 변했을 120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역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부여안고 또 한 번 변할 강산을 지켜보겠다며 의연한 모습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있는 예배당을 뒤로 하고 나오는 기자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