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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호남과 기독교

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요 며칠 페친인 목포의 김양호 목사와 순천의 서종옥 장로가 남장로회 선교사들을 파송한 테네시와 버지니아를 돌고 있다. 호남 기독교 역사 발굴에 진심인 두 분이다.
그 중에 1892년 7인의 선발대로 호남에서 사역한 최초 선교사 중 한 분인 미스 리니 데이비스(Miss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 1862-1903.6.29)와 관련한 일화.
그녀는 7인 중 처음으로 주미공사 이채연 부인(워싱턴디시에서 아들 화순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여 괴로움에 귀국 결심)과 함께 1892년 10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어머니가 10월 28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 인성부재에서 사역하다가 1898년 6월 9일 해리슨(William B. Harrison, 1866-1928) 목사와 군산에서 결혼했다. 이어 전주로 사역지를 옮겨 5년간 사역하다가 발진티푸스로 별세했다.
그녀의 부친 아르키메데스 데이비스의 묘를 찾으니 묘비는 무너져 흙 속에 누워있다. 테네시를 넘어 버지니아롤 들어가는 입구의 한 시골 아빙돈을 헤매다닌 끝에 찾은 모습이다. 몇 년 만 그대로 두면 덮여서 알 수 없는 상태다.
 
온라인에 깨끗한 리니 데이비스 사진이 없어서, 그 남편 해리슨의 두 번째 아내인 한국의 첫 간호학교인 보구녀관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한 마가레트 에드먼즈(Margaret Edmunds Harrison, 1871-1945)가 보관하던 사진을 스캔해서 올린다. 이번 기회에 리니의 얼굴을 다시 보고, 그녀의 헌신을 기억하면 좋겠다. 사실 에드먼즈는 자신의 서재에 린니의 사진을 걸어놓고 동료/선배/남편의 전처인 데이비스 선교사의 희생을 기억했다. 첫 딸을 낳고 그 이름을 Selina로 했는데, 역시 첫 아내 리니를 기념하는 이름이었다.
전주 예수병원 선교사 묘원의 리니 데이비스 해리슨의 묘소도 올린다. 왼쪽 첫번째가 그녀의 묘비이다. 부친(리니가 세 살 때인 1865년 별세)의 묘비 모양을 따라 거의 동일하게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리니가 사망하기 전에 남편에게 그런 작은 오벨리스크(obelisk)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이기고 천성을 향해 가는 모습, 부활의 상징이다. 이역에서도 장인 장모를 기억하며 아내의 묘비를 만든 해리슨 목사의 손길도 귀하다.

 
참고로 Lebanon, Marion County, Kentucky에 있는 해리슨 목사와 에드먼즈의 묘비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