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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나 리니 데이비스 요 며칠 페친인 목포의 김양호 목사와 순천의 서종옥 장로가 남장로회 선교사들을 파송한 테네시와 버지니아를 돌고 있다. 호남 기독교 역사 발굴에 진심인 두 분이다.그 중에 1892년 7인의 선발대로 호남에서 사역한 최초 선교사 중 한 분인 미스 리니 데이비스(Miss Selina "Linnie" Fulkerson Davis, 1862-1903.6.29)와 관련한 일화.그녀는 7인 중 처음으로 주미공사 이채연 부인(워싱턴디시에서 아들 화순을 낳았으나 곧 사망하여 괴로움에 귀국 결심)과 함께 1892년 10월 18일 서울에 도착했다. 도착 직후 어머니가 10월 28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 인성부재에서 사역하다가 1898년 6월 9일 해리슨(William B. Harrison, 1866-..
양행 洋行 양행 洋行의 뜻 1. 중국 청나라 때에,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던 관허 상인(官許商人)들이 결성한 조합. 2.서양으로 감. 3.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제물포에는 世昌洋行이 있었다. 조선 고종 20년(1883)에 독일 마이어 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무역 상사. 강원도 금성의 당현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으며, 인천에서 상하이(上海)를 거쳐 홍콩에 이르는 기선 정기 노선을 운영했다. 1904-05년 영문판을 보면 싱거 재봉틀 Singer sewing machine 선전이 나온다. 제물포의 함릉거(Holme Ringer) 양행이 판매했다. 그 옆에는 뉴욕에서 수입한 연유(condensed milk)를 광고하는 세창양행(E. Meyer & Co)의 광고. 1909년 평양에는 서..
평양 1926년 예수교인 통계 평양 1926년 1월과 서울 100년 후 다음 책 평양부, (평양, 1926.10)에 따르면 ● 종교 인구 = 23,149/112,929명 = 20.5% (일본인 중 신도 신자, 불교 신자가 많아서) ● 예수교인 인구 = 일본인 281 + 외국인 경영(장로회와 감리회) 7,404 + 조선인 경영 250 = 7,935 = 7.0% ● 한국인 중 예수교인 = 7,654/88,752명 = 8.6% 1930년대 초반으로 가면 10%가 되고, 소위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자랑하였다. 이후 0%로 소멸했다. 교만은 패망의 원인이다. 서울도 한 때 예수교인 30%를 자랑하다가, 이제 10%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 선거 후에 더 감소할 것이다
대구 제중원의 시작, 1898년 "1897년 성탄절에 대구에 도착한 존슨(Woodbridge Odlin Johnson 張仁車, 1869~1951) 의사는 이듬해 의료 도구와 약품이 도착하자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 1899년 남산 언덕인 동산동에 선교부지를 마련하고 ‘미국 약방’을 개설했으며, 12월 남성로 교회당 터 한옥에 ‘제중원’을 개설했다. 서자명이 조수겸 통역으로 도왔다." (옥성득, [근간])에서.)
전라도 교회의 양적 성장, 1905-1908 1905-06년과 1907-08년 중 언제 더 많이 성장했을까? 일단 전라도의 남장로회만 보면 1905-06년에 더 성장했다. 대부흥운동으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으나, 그보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가 된 1905년 전후 1년간 더 급성장했다. 1905-06 기간에 놀랍게도 약 300% 성장했다. 다만 학교와 학생 수는 1907-08년에 크게 증가했다. 통계 수치는 매년 8월 말.
일제 36년간 장대현교회 강단 위 천장에 태극기 숨기고 설교 [자료 발굴] 김성여, "길선주 목사,"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166.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오른 김화식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당 위 천장 밑에 숨겨두어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하고 있었다.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였다. 국망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시골 빈대, 서울 빈대 최정숙, "평양 연광정에 각도 빈대들이," 대한매일신보, 1908. 7. 30. 서울 빈대는 살지고 빛깔도 곱다. 여러 양반들과 부자들의 호의호식하는 꿀같은 단피를 빨아 먹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시골 빈대들이 깨닫기를, 서울 양반들이 시골에 와서 수령이나 방백으로 와서 각도 백성의 피를 다 빨아 먹은고로 살이 많이 쪘으니, 그 놈들을 빨아먹으러 서울로 가서, 그 좋은 피를 다 빨아먹어 전일 원수를 갚아야 겠다고 결정, 대표를 서울로 보내니, 시골 빈대들이 서울로 몰려들더라. 왜 시골 빈대들이 서울이 아닌 평양에 다 모여서 의논을 했을까? 당시 평양은 대부흥운동 후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었다. 평양 대표들이 왜 서울로 가서 백성을 압제한 관찰사와 군수들을 비판하며 성토했을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장대현교회, 1901 [1901년 당시] 미국 장로교인은 1년에 교인 1인당 평균 16달러 헌금 한국 장로교인은 환산하면 1인당 18달러를 연보했다. (지금으로 치면 약 1,800달러 = 234만 원에 해당한다.) 1901년 북장로회 총회는 뉴욕 카네기 홀(1891년 완공)에서 열렸으나, 한국에는 노회도 없었고, 평양 교인들이 연보하여 장대현교회를 세웠다. 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첫 노회, 1912년 첫 총회로 모였다. 한국인들이 자립으로 세운 예배당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장대현에서는 기도하러 모였고, 카네기홀에서는 회의하고 공연을 보려고 모였다. 카네기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