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立婦人會 濫膓은 血誠團 愛國婦人會,” <每日申報>, 1919년 12월 19일 (3면 9단).
1919년 4월 재령 명신여학교의 교사 오현관(吳玄觀)과 그 자매로 군산 Mary Baldwin 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현주(吳玄洲)와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이정숙,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 김태복 등은 수감자를 돕기 위해 혈성단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위문했다. 이것이 여성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부인회의 남상(시원, 출발)이었다. 이는 예수교 부인회였다.
“독립부인회 남상은 혈성단 애국부인회,”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3면 9단).
삼월 일일 소요가 발발한 이래 다수의 예수교도가 구금되자 원래 황해도 재령 예수교 부속 명신여학교의 교사로 있던 오현관(吳玄觀)과 그 자매로 원래 전라북도 군산 예수교 부속 메리불덴(Mary Baldwin) 여학교 교사로 있던 오현주(吳玄洲)와 경성 세브란스병원 간호부 이정숙(李貞淑) 등은 소요 사건에 의한 입감자와 그 가족을 구제할 목적으로 사월 상순 경성에 혈성단 애국부인회란 것을 조직하고 예수교도 사이로부터 응분의 출금을 구하여 이로써 입감자에게 대한 물품의 차입 등에 종사하였는데, 그 후 사월 날짜 미상일에 동지 이순길(李順吉)이란 자로 지부 설치의 목적으로 회령 정평 군산 목포 전주 광주 황해도 흥수(興水) 지방에 파견하였더라. 당시 회의 목적은 이미 일단 불령적(不逞的) 색채를 농후하게 하여 독립 자금의 모집과 상하이 임시정부(假政府)의 원조와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로 하였더라.
--옥성득 편, <한국간호역사 자료집 II> (대한간호협회, 2017), 94.
매일 수감자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는 부인회 회원들, 1919
3.1.운동 시위자 중 수감자들을 돕기 위해 결성된 부인회가 발전해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자금을 모금하고 전달하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발전했다. 그 중앙부 회장은 김마리아, 간부 황애시덕 등이었다. 처음부터 기독교인 여성들이 조직했고, 기독교인 여성 조직으로 삼일운동,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11월에 조직이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의 체포 소식은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자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대한독립청년외교단과 대한독립애국부인회 주동자,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자: 김마리아, 이병철, 안재홍, 황애시덕
이를 정리한 최상도 교수의 글을 아래에 싣는다.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유학할 때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여 조직을 규모있게 발전시켰으며, 또한 이 조직을 바탕으로 2.8독립선언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어 국내에서 여성지도자 반열에 곧바로 오를 수 있었다. 여성 지도자로 그녀는 곧바로 3.1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3.1운동으로 체포 수감되어 갖은 옥고를 겪고도 김마리아의 독립에 대한 희망은 꺾이지 않았다. 1919년 8월 4일 경성지법 예심계 판사 나가지마의 예심종결 결정으로 풀려나게 된 김마리아는 9월 정신여학교 교사로 돌아와 항일여성운동의 활성화를 모색했다. 그렇게 해서 1919년 10월 19일, 16명의 여성들이 김마리아가 머물고 있던 정신여학교 천미례(L. D. Miller) 교사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고 조직된 단체가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이다.
그러나 항일여성운동 처음 조직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아니었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여성단체는 '혈성단애국부인회'로, "독립자금의 모집 및 상하이 가정부의 원조 및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조직되어 1919년 3월 중순경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1919년 4월 중순경, '여자고등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를 회원'으로 '약 60여 명'이 규합하여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두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로 통합되었다. 이후 단체의 명칭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독립이 지연되고 장기화되자 독립에 대한 지도부의 희망과 자신감은 상실되었고 결국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은 침체되었다. 애국부인회의 활동이 약화된 소식을 들은 김마리아는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모색하였고 이에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는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합니다. 들으니 그동안 다행하게도 오현주가 회장으로서 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을 위해 진력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동 회는 조선의 일부사람을 회원으로 했음을 불과하였었습니다. 이번에 조선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널리 회원을 모집하여, 전국 부녀들이 독립을 위해 진력함이 어떠합니까?"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재조직을 촉구했다. 기존의 부인회가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고 활동하였던 점을 한계로 인식하고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고자 했다. 김마리아가 새로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 된 애국부인회는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신설하여 종래의 독립자금을 수합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던 활동을 넘어 남자와 대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이는 회장 김마리아의 독립운동계의 정세 파악에 의한 것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으로 독립운동 방향을 설정한 것에 맞추어 애국부인회도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조직하여 노선을 일치시킨 것이다. 김마리아의 정세를 읽는 판단력에 따른 지도력과 추진력이 다시 한 번 더 입증되었다. 후일 김마리아는 상해에서 망명생활 중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자격으로 임시정부와 관계한 것으로 볼 때, 그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애국부인회의 위상은 전국 및 해외 여성들을 망라한 상해 임시정부의 여성대표기관으로서 항일여성단체였음을 보여준다.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안타깝게도 동지의 밀고로 1919년 11월 28일 발각되어 조직임원들이 모두 검거되어 사실상 국내 활동이 와해되었다. 김마리아는 이로 인해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재판을 받았고 마침내 3년형 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라고 항변했으며,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며 한평생 대한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지도자였다.
1923년 도산 안창호는 "그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됐을 것이다"라고 그녀를 평했다.http://www.pckworld.com/article.php?aid=7950381485 <한국기독공보>, 2019년 1월 29일 자.
위에서 밀고자는 오현주였다. 그녀는 오긍선 의사의 동생이었다. 오현주는 회장 겸 재무주임에 취임한 뒤, 조직을 지방으로 확대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현주는 곧 남편 강낙원의 권유로 조직에서 손을 뗀 뒤, 남편과 함께 김마리아 등 옛 동지들을 밀고해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되도록 했다.
김마리아가 추후 《삼천리》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오현주는 애국부인회 회원들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이 단체의 공금을 가로챘다고 하며, 이와는 별도로 일본 경찰로부터 밀고한 공을 인정받아 상금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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