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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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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태형과 평양 신학생들 십자가 태형 1912 조선 태형령이 부활되었는데, 이는 105인 사건 때 구속한 자들을 고문하기 위해서 였다. 이 고문형은 1919년까지 폐지되지 않아, 3.1운동 시위 참여자로 체포된 자들은 모두 태형에 처해 졌다. 30대, 40대, 60대, 90대 등에 처해 진 자들이 많았고, 이어서 징역 6개월, 1년, 2년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감옥에 보내지지 않고 마을 단위로 태형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충남 아산군의 도고면과 선장면에서는 192명이 태형 40 혹은 60을 받았다. 다음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의 경우이다. 1919년 삼일운동 시위 참여자 수 천 명 십자 형틀에 묶고 태형 30대로 고문을 시행했다. 평양에서 신학생 몇 명은 태형 후 십자가틀을 매고 거리에서 끌려다녔다 ​ 1. 다음은 1912년 3월 ..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 대한독립만세 선교사들은 여러 지역의 삼일운동 목격담을 이런 보고서로 132 쪽을 만들어 뉴욕 등으로 보냈다. 여기에 올린 부분은 그 첫 부분으로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열린 장로회 교인들의 독립 만세 장면을 보고한 번하이젤 선교사의 보고서 앞 부분이다. 이 부분의 설명에 대해서는 김승태, "평양에서의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를 보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98?category=818327 위 부분을 타이핑 transcription하면 다음과 같다. The Independnece Movement in ChosenPyeng Yang, Chosen, March 1st, 1919 This has been a memorable day in the history ..
1919 의주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유여대 목사의 평양 장신 졸업 때 모습, 1915년의주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 창가 합창, (6) 만세, (7)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1919 함흥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김승태, 함흥에서의 3 · 1운동과 조영신 전도사 , 기독교사상 (2018.6): 96-105. 함흥 3·1운동함흥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25일부터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만세시위는 3월 3일 함흥 장날에 시작되어 6일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을 주동자들의 재판 기록을 통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2월 25일 원산 광석동교회 장로이자 전도사인 이순영(李順榮)은 함흥 중하리예배당(함흥남부교회)에 와서 함흥지역 교회 지도자들을 초치하여, “현금(現今) 세계의 대세는 민족자결의 기운으로 향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열국 강화회의의 문제에 포용(包容)하게 함으로써 차제(此際)에 나아가서 조선독립의 청원서를 동(同) 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급무(急務)”라는 요지의 연설을 ..
1919 평양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 2018년 5월호. 91-100. 평양 3·1운동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000여 명이 모여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봉도식에 이은 독립선언식에서는 단상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일선(丁一善)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강규찬(姜奎燦)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의 교사와 학..
1919 제암리 학살사건 성경을 읽은 결과: "어떤 학살 사건" (사이토 이사무, 1919년) 아아 조국이 망했는데, 당국이 무단과 폭력을 사용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불복종하며 자유를 요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 기독교인들이 모여 '소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으랴. 아,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교회, 그 날은 수난 주간 화요일이었다. 齋藤勇, "어느 살육 사건," 小川圭治 지명관 편 (김윤옥 손규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 727-729. 원문은 1919. 5. 22일자에 있음. 삼일운동을 본 프레드릭 맥켄지 신문 기자는 말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수용했다. 미국에서 온 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으로 청결하게 되고, ‘안방’에 ..
1919 만세 반석 열리니 찬송가 한 장으로 만세 삼창 1919년 3월 8일은 토요일이었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미리 전달 받은 독립선언문이 뿌려지고 800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역과 주요 지역마다 출동한 경찰과 헌병이 깔렸다. "만세"를 외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졌고, 역의 확성기에서는 이 명령을 계속 반복해서 내보냈다. 삼엄한 경계 속에 토요일 밤이 찾아 왔다. 3월 9일 이튿날 주일 아침 한국인 목사들이 모두 구금된 상태에서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 대구의 브루엔 목사는 예배 때 어떤 찬송을 부를까 잠시 고민했다. 침울한 교인들을 격려하되 관심을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찬송을 찾았다. "십자가 군병들아"가 우선 떠올랐다. 그러나 부적절해 보였다. 이어 "Rock of Age" (만세 반석..
1919 평양숭실의 모우리 교수의 고난 삼일운동과 모우리 우리가 기억하는 모우리 Rev. Eli Miller Mowry(1880-1971) 선교사의 모습은, 1919년 3월 1일 평양 숭실대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경찰에 쫓기다가 10여 명이 교수인 모우리 사택으로 숨어들자, 이들을 숨겨준 죄목으로 4월 10일 평양 지방법원에서 1심 재판을 받은 후 감옥에 갈 때의 다음 모습이다. 1919년 4월 10일 평양법원에서 1심 재판 후 방갓을 쓴 모우리 목사의 모습. 19일에 6개월 징역형 선고를 받기 전. 174 cm였으니 그렇게 큰 키는 아니었으나 마른 체형이라 크게 보였다. 평양 경찰서는 시위가 어느 정도 진정된 4월 2-3일 평양 시내 선교사 사택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가택 조사를 실시했다. 이때 모우리 사택에서도 몇 명의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