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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1919 평양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

김승태, “평양에서의 31운동과 김선두 목사,” 기독교사상20185월호. 91-100. 

 


평양 3·1운동

191931일 오후 1,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000여 명이 모여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봉도식에 이은 독립선언식에서는 단상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정일선(丁一善)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강규찬(姜奎燦) 목사가 독립운동에 <92>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갔다.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3대로 나뉘어 시내를 행진하였으며,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교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경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35일까지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일제 헌병 경찰은 3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갔으며, 38일까지 검거한 인원수만 해도 400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하고,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이날 평양 숭덕학교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에는 모펫(S. A. Moffett), 모우리(E. M. Mowry), 번하이젤(C. F. Bernheisel) 등 네 명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가 참관하였다. 그중 한 사람인 번하이젤은 이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평양 191931

이날은 이 나라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날이다. 전 대한제국 황제 이태왕(李太王, 고종)이 최근에 죽었으며, 모레는 장례식 날로 예정되었다. 그 장례식은 일본제국의 황족의 자격으로,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그 장례식은 신도의식(神道儀式)에 따라 엄수되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에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장례식이 자기 나라 의식에 따라 치러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례식 때에 서울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93>

() 고종 황제를 애도하는 봉도회(奉悼會)가 이 도시에서 열릴 것이라고 며칠 전에 발표되었다. 한 모임은 숭덕학교(기독교계 남학교), 다른 모임은 감리교회, 그리고 세 번째 모임은 천도교 본부에서 각각 열릴 것이다. 천도교는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반()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조직이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뒷켠

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13-17, 로마서 9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 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이렇게 일어난 평양 31운동의 준비 과정을 재판기록을 통해 일자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9128이승훈(李昇薰) 장로와 양전백 목사가 선천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 사경회에서 만나 국제정세 협의.

26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파송된 선우혁(鮮于爀)‘105인 사건의 동지인 선천의 양전백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 협의.

27선우혁이 ‘105인 사건의 동지인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 독립운동 협의.

29선우혁이 이승훈의 소개장을 가지고 ‘105인 사건의 동지인 평양 강규찬 목사의 집에 들렀다가 그와 함께 길선주 목사를 찾아가 독립운동을 협의하고, 장대현교회 부목사 변린서(105인 사건 동지)를 소개받음. <95> 이때 예수교서원 안세환도 동참. 이때부터 변린서 목사는 서문외교회 김선두 목사,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장대현교회 이덕환 장로, 윤원삼(尹愿三) 장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도인권 목사, 김성택 목사 등과 함께 독립운동 준비.

210이승훈이 선천의 백시찬 장로의 집에서 평양을 다녀온 선우혁을 다시 만남.

211서울에서 최남선이 김도태를 정주 이승훈에게 보내(27) 급히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도록 전갈. 당시 이승훈은 선천에 있었으므로 오산학교 교사 박현환에게 부탁하여 박현환이 선천에 가서 이승훈에게 전달, 그날 저녁 기차로 상경.

212이승훈, 서울에 도착하여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와 합작할 것을 합의하고, 세브란스병원 이갑성을 만나 소식을 전하고, 선천행 기차를 탐.

213이승훈, 선천에 도착하여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명룡 장로,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 등을 만나 천도교 측과 협의한 내용을 전하고 동의 받음.

212, 13일경윤원삼, 황찬영(黃賛永, 숭덕학교 교사), 김제현(金濟鉉), 곽권응(郭權膺, 숭덕학교 교사) 등이 예수교서원으로 안세환을 찾아가 도쿄(東京) 유학생이 조선독립선언(28독립선언)을 발표했으므로 그것을 성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논의를 함.

214이승훈, 저녁 기차로 평양으로 출발.

215이승훈, 아침에 평양에 도착하여 기홀병원에 입원, 중국으로 떠나는 손정도 목사를 만나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를 소개받음.

216이승훈, 기홀병원에서 신홍식, 길선주 목사를 만나 참여를 확답받고, 저녁 기차로 상경.

217길선주 목사가 황해도 장연으로 사경회 인도를 위해 떠나면서 <96> 안세환에게 도장을 맡기자, 그날 저녁 안세환이 기차로 상경.

225일경윤원삼의 소집으로 숭현여학교 사무실에서 정일선, 곽권응, 안세환 등이 모임, 서울에서는 31일 오후 1시 봉도식을 거행하고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르게 되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행사를 하자고 안세환이 제안을 하여 일동이 이에 찬동하고 협의한 결과 김선두를 사회자로, 강규찬을 연설자로, 정일선을 선언서 낭독자로, 곽권응은 찬미가를 부르고, 황찬영은 안내역을 위해 활동하기로 하고 윤원삼은 만세를 삼창하기로 결정.

226일경평양 각 교회에 서신으로 31일 오후 1시 숭덕학교에서 봉도식 행사가 있으니 참가하도록 알리고,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태극기와 전단을 만드는 등 행사 준비에 들어감.

227일경정일선이 김선두 목사와 강규찬 목사를 만나 거사 계획을 알리고, 순서를 담당해줄 것을 부탁하여 쾌락을 받음.

228윤원삼이 숭덕학교 부근에서 정경필(鄭京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받아 그 가운데 100장은 평양 감리교 목사 김찬흥(金燦興)에게 주고, 나머지는 31일 숭덕학교에서 배포함.

31오후 1시에 장로교는 숭덕학교 운동장, 감리교는 남산현교회, 천도교는 설암리 교구당에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 시위에 합류.

 

김선두 목사의 역할과 법정 투쟁

앞에 소개한 번하이젤의 기록에서 드러나듯이 김선두 목사는 평양 독립선언식의 사회를 맡았다. 앞선 고종의 봉도식 축도를 마친 후에 그는 베드로전서 313-17, 로마서 9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97> 성서 말씀으로 독립선언식을 개회한 것이다. 독립선언식 식순에 성서봉독이나 설교 순서는 없었지만, 이 본문 말씀으로 설교를 대신한 것이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3-17, 개역한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9:3, 개역한글) 

위 본문을 통해 김선두 목사는 형제자매인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고난(만세시위)에 동참하자는 뜻을 내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규찬 목사의 연설에 이어 김선두 목사가 구속되어 천년을 살기보다는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군중을 열광시켰다. 김선두 목사의 사회자로서의 발언 내용은 그날 현장에 참석했던 익명의 선교사(선천의 로버츠일 가능성이 큼)를 통해 중국에도 전해져 천진(天津)에서 발행된 일간지 익세보(益世報) 1919327일 자에도 실렸다. 

만약 여러분이 열심히 선한 일만 하면 누가 감히 여러분을 해코지 하겠습니까. 정의를 위하여 수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복된 것입니다. 남들의 <98> 위압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무질서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면, 누가 여러분에게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가 물어오면, 준비된 마음으로 온화한 태도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도움 없이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로 인해 비방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하여도 기독교인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정의로 말미암아 수난을 당한다고 하면, 정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여 수난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진리만 이야기할 뿐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양심에 따라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함이 나를 위하여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는 평생 하나의 걱정밖에 없습니다. 나의 피붙이인 형제자매가 망국민이 된 것을 통탄할 뿐입니다. 

김선두 목사는 이 일로 32일 새벽에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관할 법원인 평양지방법원이 있었지만,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알 수 없다. 19198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6개월을 선고하였다. 그러자 이에 불복 항소하여 9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2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나는 피고 정일선으로부터 이태왕 전하 봉도식을 거행하니 사회자로서 출석하여 위 회의 순서를 맡아줄 것을 의뢰받고 조선독립의 계획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고서 사회자의 일을 승락하였다. 나는 유럽 전쟁의 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은 자유 독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듣고 그 이후 <99>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게 되었는데 그런 연유로 독립선언식의 사회자가 될 것을 승낙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선언식은 올해 31일 오후 2시경 개회하게 되고 그날 나는 숭덕학교 운동장에 참가하여 구한국 국기를 앞세우고, 곽권응은 나의 지도에 따라 약 천 수백 명의 군중에게 종이로 만든 작은 태극기 수백 개를 배부하고, 나는 사회자로서 이제부터 조선독립 선언식을 거행한다는 뜻을 말하고, 정일선은 경성(서울)으로부터 보내온 선언서라고 제목한 조선민족은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하여 최후의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일본의 기반을 이탈하여 목적을 관철하자는 뜻을 기재한 불온문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기타 자는 선언서를 일반 회중에게 배부하고, 강규찬은 세계는 모두 인도를 중시하며 자유평등을 칭하기에 이르고 조선도 자유하게 되어 독립하기에 이른 것은 함께 축하해 마지않는다는 뜻의 선동적 연설을 했다. 나도 역시 구속되어 천년을 살기보다는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군중을 열광시키고, 윤원삼은 먼저 조선독립만세를 3창하고 우리들은 군중과 함께 이에 창화하여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하게 되었다. 

1, 2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자 김선두 목사는 정일선과 함께 우리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따른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부당하므로 복종할 수 없어 상고한다.’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020일 기각 판결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 형무소 시절의 김선두 목사


 당시 장로회 총회는 매해 9월 초순경에 개최되었으나, 1919년에는 31운동의 여파로 한 달이나 늦은 104일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열렸다. 그러나 당시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복역 중이었으므로 부회장인 <100> 모펫(마포삼열) 선교사가 회의를 주재하였다. 이 사실은 회의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회장 김선두 씨가 본년 3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금되어 본 총회로 보낸 편지에 문안함과 축복함과 회장 직무를 부회장 마포삼열 씨에게 위임한 말씀을 서기가 낭독하매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부회장이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다.(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회록, 1 

김선두 목사는 정일선 장로와 함께 12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1920430일에 만기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된 후 목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일제가 한국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19388월에는, 일본 유학생으로 있다가 잠시 귀국한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신사참배 강요를 막기 위해 활동하였다. 귀국 후 일제경찰에 구속되어, 정작 신사참배를 가결한 제27회 장로회 총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월남하였으며, 1949년 서울에서 소천하였다. 2007년에 우리 정부는 그에게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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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한국근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식민권력과 종교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