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기독교사상), 2018년 7월.
유여대 목사의 평양 장신 졸업 때 모습, 1915년
의주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 창가 합창, (6) 만세, (7)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
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백 수십 매도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를 하였다. 서울에서 준비한 독립선언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동경의 2・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그날 새벽에 등사판으로 등사한 선언서를 낭독하려 할 때에 마침 서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40-150매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助事)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담아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김두칠, 정명채, 김이순, 김창건, 강용상 등은 그곳에서 준비한 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배포하던 것을 중지하고, 서울에서 선천을 거쳐 그때 막 도착한 독립선언서를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립 창가>를 사람들과 함께 합창했다.
독립선언을 한 것은 3월 1일 오늘이라.
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
4,000년 이래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
누가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할 수 있으랴.
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天帝)의 명령이요.
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이어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고, 학생을 선두로 독립만세와 <독립 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헌병경찰은 유여대 목사 이하 주동자 7인을 헌병대에 구속했다. 이날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3월 2일 시위부터는 천도교 측이 가세하여, 의주 남문 밖 광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인근 지역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날 오후에는 기독교인과 주민 3,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30명이 체포되었다.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몇 개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의주의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金秉祚) 목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에는 참여하지만 서울의 독립선언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의주 지역 일대의 독립선언식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약속했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대로 1919년 3월 1일 의주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만의 행사였다면, 유여대 목사와 김병조 목사가 주도한 의주 3・1운동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가 직접 민중들을 지도하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날 유여대 목사와 함께 의주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한 김병조 목사는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의주(義州) 인민의 독립선언
의주는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김승만(金承萬), 장덕로(張德櫓) 등 4인이 음력 정월 10일(양력 2월 10일)에 평북로회(平北老會) 축하차 선천(宣川)에 가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10여 명의 동지와 더불어 국사의 광복을 공의(共議)한 후, 의주 일경(一境)의 일은 4인이 분담하기로 하고 돌아왔다.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密布)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서울)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즉시 이원익(李元益), 김창수(金昌洙), 안석응(安碩應) 3인으로 하여금 선언서를 도청(道廳)과 군청(郡廳) 및 경무국(警務局), 헌병대(憲兵隊)에 전치(轉致)하고 시민에게 고루 전한(均傳) 후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劉如大)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黃大闢), 김이순(金利淳)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 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수 시간이 지나 일본군이 급히 이르러 유여대 이하 6인을 헌병대에 구류하였다가 그날 밤에 내보냈다.
위의 기록에도 나오듯이 의주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유여대 목사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한 1919년 2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5월 6일에 유여대 목사는 3・1운동 참여 동기를 묻는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금년(1919년) 2월 10일경 선천(宣川) 평북노회(平北老會)가 끝나는 날에 나는 선천으로 갔다. 의주(義州) 방면의 노회는 의산노회(義山老會)라고 부르는데, 전에 평북노회에 속하여 있었는데 작년에 위 노회로부터 분리되어서 작년까지의 전도회가 남아 있어서 이번에 분리하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의산노회의 회계를 담임하고 있으므로 그 돈을 받기 위하여 간 것인데, 선천에서 양전백(梁甸伯)의 집에서 동인을 만났던바 동인이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독립선언서의 대표자로 되면 어떻겠느냐고 하므로 나는 원래 조선독립의 의사가 있었으므로 거사를 같이 할 것을 약속하였던바, 양전백은 독립선언은 경성(京城) 및 각지에서 하기로 되었는데 그 운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는 경성으로 갈 생각이므로 너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찬성은 하겠으나 경성으로 가는 것은 어려우므로 의주 방면은 일을 (내가) 담임하겠다고 말하여 두었다.
그가 실제로 선천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장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날은 2월 13일이었다. 그 후의 행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도 그는 다음과 같이 상세히 대답한다.
선천에서 의주로 돌아왔으나 비밀인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2월 17,8일경에 의주면 서부동(西部洞) 과부의 집 숙박업소에서 정명채(鄭明采), 김두칠(金斗七)에 대하여 선천에서 양전백과 함께 약속한 사실을 전하고 위 두 사람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고 의주군 주내면(州內面) 용운동(龍雲洞)교회에 동월 23,4일경부터 27,8일경까지 사경회(査經會)가 개최되어 나는 성경을 가르쳤으나 그간에 나는 양전백으로부터 무엇인가의 통지가 있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2월 27일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주(定州)의 사람인 선천교회의 영수 도형균(都衡均)이 나를 찾아와서 독립선언은 3월 1일에 경성 및 각 지방에서 발표하기로 되었으므로 의주에서도 동일을 기하여 행하라. 그 방법은 경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보내올 터이니 그것을 낭독하고 발표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는데, 2월 28일까지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날 밤 정명채, 김두칠 등과 의주면 양실학교(養實學校)에 모여서 독립선언의 발표에 관하여 협의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20인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서 독립선언에 관하여 찬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내일의 일에 관하여 순서를 상의하고, 내가 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더니, 누구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으나 다른 곳에서 발표한 선언서(2・8독립선언서)가 있다고 하면서 한 장의 선언서를 내놓았으므로, 그 선언서를 등사하여 준비해 놓고, 만일에 경성으로부터 선언서가 오지 않을 시는 그 등사한 것을 배포하기로 결정하고, 정명채, 김두칠에게 그것을 등사하도록 명하고, 또 내일 오후 2시 반경 서교회당의 공지에 집합하여 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안석응(安碩應)에 대하여 내일은 도청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도록 명하고, 그날 밤은 서로 헤어지고, 그다음 날 3월 1일 오후 2시경 안석응에 대하여 어젯밤에 명령한 바와 같이 각 관청에 선언서를 배포하고 오라고 말하고, 나는 오후 2시 반경에 상의한 장소로 갔었는데, 그때 양실학교 교사에 대하여 생도를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교사는 생도를 데리고 그 장소로 왔고, 생도의 부형들도 참가하여 7~80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하고 있던 중, 선천으로부터 약 200매의 선언서를 보내왔으므로 등사판으로 만든 것은 중지하고 그 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고 나는 그것을 낭독하고 일동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던 차에 헌병이 와서 우리들을 체포하였다.
유여대 목사의 법정 투쟁
유여대는 1878년 12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서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향리에서 한학을 사숙하여 18세 되던 해인 1895년 자택에 한문사숙을 열고 훈장을 맡았다. 안승원(安承源)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여 의주 서교회(西敎會)에 출석하면서 20세 무렵인 1898년 미 북장로회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5년 서교회에서 운천교회가 분립하고 부설학교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교사를 맡았다. 1907년 서교회에서 양실학원(양실중학교)을 확장할 때 최광옥, 이성하 등과 함께 교원으로 있었다. 1910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면서 의주 동교회(東敎會) 영수로 있다가 1911년 그 교회 조사를 맡았다. 1914년 8월 동교회 장로로 장립되고, 1915년 6월 장로회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여,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모교회인 동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는 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3・1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무렵 동교회 교인은 300여 명이었다.
유여대 목사는 3월 1일 오후 독립선언식 직후에 안석응(安碩應), 김창건(金昌健), 김두칠(金斗七), 장창식(張昌拭), 강용상(康龍祥), 정명채(鄭明采) 등과 함께 헌병경찰에게 체포되어 의주헌병분대에서 신문을 받고, 3월 4일 ‘보안법 제7조’ 위반 혐의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 이송되었다. 3월 7일 유여대 목사는 신의주지청 검사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이 의주 독립선언식의 지휘자임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민족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피력하였다.
문 : 이들의 문서나 기 등은 모두 그대가 지휘하여 만든 것이 틀림없는가.
답 : 나는 독립선언을 하려면 이러이러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신도를 모아 놓고 이야기하였더니 그자들이 협의를 하고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내가 지휘한 것과 같은 셈이다.
문 :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이번과 같은 소요를 일으켰는가.
답 : 양전백의 말에 의하여 조선민족 대표자로부터 파리의 강화회의에 파견하는 사람들에게 조선은 일반적으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통지하면 강화회의에 독립 요구를 제출하여 각국의 동정을 얻고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다.
문 : 가령 조선이 독립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전의 조선과 같이 당파의 싸움과 각국의 야심 등으로 도저히 독립을 유지할 수 없고 도리어 국내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지 않았는가.
답 : 국민 전부가 독립 정신이 충만해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문 : 가령 정신만 있다고 할지라고 실력이 수반하지 않는 이상은 독립을 오래 지탱할 수 없지 않은가.
답 : 실력은 이제부터 양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검사는 3월 8일 이들 모두를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청에 기소하였으나, 사법부 장관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재판을 경성지방법원에서 취급하라는 총독의 명령이 있으므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하라는 전보를 받고, 3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 이송하였다. 이 사건을 인계받은 경성지방법원은 4월 8일 이들의 공판을 당시 “예심계류 중인 손병희 등 보안법 위반 피고사건의 예심종결에 이르기까지 이를 정지”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참고인으로 예심판사의 신문을 받을 때도 다음과 같이 민족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토로하였다.
문 : 정부의 승인을 거친 후 비로소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전에 피고 등은 어찌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는가.
답 : 그것은 자결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문 : 참고인은 어찌하여 일본의 주권을 이탈하고 조선을 독립시키려고 희망하는가.
답 : 조선민족이 자유롭게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독립을 희망한다.
문 : 일본 제국신민이 되어 있는 편이 자유의 발달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답 : 나는 독립하지 않으면 발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문 : 병합 전은 인민은 자유를 압박받고 있었으나 독립을 하여서 그와 같은 상태로 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하여 공화정부가 되고 열국의 대열에 서서 가도록 하고자 생각하고 있다.
문 : 그대는 정치에 대하여 불평을 가지고 있는가.
답 : 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조선인에 대하여 자유를 주지 않는다는 데 불평이 있는 까닭이다.
조선일보, 1920년 7월 15일
그 후 8월 1일 손병희 등 47인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자, 경성지방법원은 유여대 목사를 비롯한 의주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을 재개하여 8월 14일 민족대표였던 유여대 목사와 안석응, 김창건 등 6인의 재판을 분리하여 판결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손병희 등 47인의 예심 결과와 같이 ‘관할위’(管轄違, 해당 사건을 담당할 수 없음)로 판결하여 이후 고등법원에서 손병희 등 47인과 함께 병합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고등법원 검사국은 8월 26일 자로 유여대를 “손병희 외 46명에 대한 내란 피고사건과 병합심리” 하도록 고등법원에 예심청구를 하였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에서 예심이 종결되고, 이에 따라 경성지방법원에 다시 배정된 이 재판은 같은 해 8월 9일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공소 기각) 결정을 하였다.
9월 20일부터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공판 3일째인 9월 22일 유여대 목사에 대한 판사의 법정 신문이 있었는데, 여기서 독립에 대한 감상을 묻는 판사의 질문에 그는 “다만 하나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노라.”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는 유여대 목사에게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징역 2년에 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을 형기에 산입하도록 판결했다.
상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된 유여대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천도교의 홍기조 도사와 함께 1921년 11월 6일에 만기로 출소하였다. 1921년 11월 7일 자 「동아일보」는 그의 출옥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11월 6일) 9시 10분에 류여대(劉如大) 씨가 역시 깨끗한 의복으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옥문 밖에 나타내며 기다리던 가족과 친구에게 일일이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역시 미리 준비하였던 자동차로 돌아왔는데, (류여대) 씨는 옥중 감상을 말하되 우리들에게는 옥리들도 그리 가혹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나 다른 죄수를 다루는 것을 보면 때때로 몹시 때리는데 아무리 죄수라도 너무 불쌍한 생각이 있었으며, 모든 자유를 빼앗긴 옥중 생활을 하여보니까 더욱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으며 출옥한 후에 대하여는 모든 일이 순서가 있고 세월이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오직 가장 정의 인도라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힘을 쓸 뿐이라 하더라.
그는 출옥하자마자 의주 동교회 담임으로 복귀하여 목회를 계속하는 한편, 3・1운동으로 폐쇄되었던 양실학교의 재건을 위해 힘썼다. 1925년 2월에 그는 제13회 의산노회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1931년 20여 년간 시무하던 의주 동교회를 사임하고, 신의주로 이사하여 그곳 백마교회를 담임하여 예배당을 새로 짓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나 1934년 신병(身病)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휴양을 하면서도 후학들을 위해서 계몽적인 저술 활동에 힘써, 설교를 모은 『강대지남』(講臺指南), 귀감이 될 만한 동서고금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소개한 『위인기담』(偉人奇談), 각종 서식 작성법과 상식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 『면무식』(免無識) 등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건강이 더 악화되어 1937년 1월 13일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62년에 우리 정부는 그에게 3・1운동에 참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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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 한국근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한말 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식민권력과 종교』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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