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선교사의 사전 참여 문제] 숨어 있는 선교사
일제 경찰은 기독교인 시위 뒤에는 선교사의 지시, 가르침, 도움 등 직접 연관이 있다고 믿고, 평양 숭실의 모우리를 구금하고 2주일간 심문했다. 대부분 선교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선교사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하고, 시위를 계획하고, 연락하고, 시위를 주동하는 행동대원이었으며, 시위 후에도 선교사 집에 숨어 있었기에, 그 관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일제는 그 연관성을 밝히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
선교사들은 이구동성 시종일관 그 연관성을 부정했다. 사전 인지를 극구 부인했다. 왜?
요즘 기독교인들은 삼일운동과 선교사와의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선교사가 제국성을 벗고 민족성을 가진다고 보는 모양이다. 어제 피디도 나에게 심증을 넘어 다른 증거는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보고서나 편지의 행간을 보면, 또 몇 곳 지방의 경우를 보면, 사전 인지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제가 그 직접 연관성을 밝히면, 한국인 학생들이나 교인들이 선교사의 사주를 받은 게 되고, 그래야 한국인에게 자결이나 독립 역량이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연관성이 없다고 해야 정교분리 원칙을 유지하고, 법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제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사전 인지를 부인했다.
선교사들의 편지나 보고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이면, 선교사는 한국인의 현실에 무관심하고 일제에 충성한 자가 된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선교 현장에서 섬기다가 보면 사람이 먼저요, 그들의 고난을 함께 체험하게 되므로, 다층적으로 얽히게 된다. 이것을 법적인 용어로 정리한 법정 심문서 등에서는 볼 수 없다.
숨어 계신 하나님, 숨어 있는 선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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