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3.1운동 (1919)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잊혀진 설립일과 첫 정청[청사]의 위치

옥성득 2016. 2. 15. 14:54


현재 상하이에 새로 꾸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된 작은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프랑스 조계 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할 당시 사용한 첫 정청(청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첫 청사에 대해서 독립기념관에서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본래 위치나 주소를 잘 모르는 듯하다.

 

자료 1. 현재 독립기념관 웹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16)

 

임시정부 청사 보창로 309호

◎ 옛주소 : 상해시上海市 불조계佛租界 보창로寶昌路 309호

◎ 현주소 : 상해시上海市 회해중로淮海中路

◎ 사적지 : 임시정부가 청사로 사용한 곳


1920년 상해에서 발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문서』에 임시정부 청사 사진이 실려 있다. 그 사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청사 보창로 309호’란 설명이 있고, 2층 양옥집 건물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임시정부가 보창로 309호를 청사로 사용하였다는 문헌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수립 초기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창로는 이름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원래 서강로西江路였던 이름이 1906년에 보창로寶昌路로 바뀐 것이고, 이후에도 하비로霞飛路 1915년, 태산로泰山路 1943년, 임삼중로林森中路 1945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950년 회해중로淮海中路로 바뀌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25년과 1932년에 번지수도 변화가 있었다. 때문에 1919년 당시 보창로 309호가 현재 회해중로의 어느 번지에 해당하는 지는 확인하기 어렵고, 더욱이 회해중로 일대가 완전히 재개발되어 옛 건물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이 설명과 사진에 의하면 보창로가 1915년에 하비로로 바뀌었으므로, 1919년이면 ‘하비로 309호’로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박은식의 책이나 임정 의정원 문서에 ‘보창로 309호’로 되어 있다면 이상하다. 이 글을 쓴 연구원은, 회해중로 일대가 재개발되어 당시 보창로 309호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곧 아직도 최초의 청사 자리가 ‘보창로 309호’로 알고 있다.


자료 2. <韓民>, 1937. 4. 30

http://search.i815.or.kr/OrgData/OrgList.jsp?tid=ns&id=HM1937043002-01

그러나 독립기념관에서 온라인으로 올려놓은 193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한국국민당 기관지로 발간된 <韓民>을 보면 다르게 되어 있다. 화면을 그대로 붙여 보았다.

 


대한민국 19년(1937년) 4월 30일자 <韓民> 30호에는 임시정부 설립을 기념하자는 사설이 실리고, 첫 청사 사진을 넣었다. 사진 아래 캡션에는 “大韓民國 臨時政府 臨時政廳”이라고 되어 있고, 그 왼쪽 옆 설명에는 “民國 元年붙터 使用하던 上海 霞飛路 三二一號”로 되어 있다. 사진을 확대해 보자.

 

                     

 

ⓒ옥성득


곧 ‘보창로 309호’가 아닌 ‘하비로 321호’였다. 물론 청사를 1925년 이전에 10회 이상 이사를 했다고 해도, 민국 원년부터 사용하던 청사의 주소는 분명 ‘하비로 321호’였다.

 

하비로(현재의 회해중로)가 이름이 바뀌고 재개발되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청사 자리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독립기념관의 직무유기라 할까 한국사 학자들의 수치가 아닐까? 당시 지도를 면밀히 검토해서 하비로 321호 주소를 찾아 현재 위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자료 3. <신보>, 1919년 4월

이 첫 청사는 신규식 선생이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고 한다. 4월 10일 의정원이 마련한 헌법과 결의에 따라 4월 13일 오전 10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중국 신문 중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申報>는 한국 독립지사들의 동정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상세히 보도했다. (“잊혀진 상해임시정부 수립일, 4.13,”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2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7747)


- 상해에서 한국임시정부 성립

- 한국인 6명이 어제 안동 순찰병들의 눈을 피해 상해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의 임시정부에 협조하는 요인들인데 임시정부의 총리는 이들에게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보낼 청원서 초고를 작성하게 명하였다. 이 씨라는 한국인은 어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잠입했는데, 이 사람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한국 영도자였다.

- 현재 상해에는 한국의 입시의정원 의장과 부의장 등이 모두 체류하고 있고 내무 사법 재무 교통총장 등도 상해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 공무총장은 이미 며칠 전에 북방을 통해 상해에 왔다고 한다.

- 몇 주일 전 상해 하비로 321번지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회를 소집하였는데, 한국 8도에서 한 도에 3명씩 비밀리에 선거하여 뽑은 대표 24명 중 21명이 상해에 도착하였으며 만주와 미국, 러시아 등지의 한국인도 각각 대표 3인을 선출하여 파견했다. 이번 국회에서는 임시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뽑았다.

 

이 기사에도 분명 하비로 321번지로 되어 있다.

 

자료 4. 신지사의 “历史: 上海租界的大韩民国临时政府:派系纷争 人财两空”

http://group.baike.com/wenhua/bbs/rAwlxZQhje3ELegQF.html

 

此时临时政府办公处已转移了好几个地方。1919年4月临时政府在法租界内成立,得到法国驻沪总领事的默认,但不准许他们挂临时政府的招牌,然临时政府成立后,为了扩大影响,“大韩民国临时政府”的牌子还是挂了几天,上海的大报《申报》因此刊登了“高丽在沪组织临时政府”的消息,并把它的地址公之于众。这事很快引起日本驻沪领事馆的不满,当年10月17日,因受到日本驻沪领事馆的压力,法租界公董局巡捕房正式通知临时政府,限令在48小时内迁出所有人员,停止发行临时政府的机关报《独立新闻》,于是临时政府转入秘密状态。临时政府从最初的办公地点霞飞路321号迁出,搬到了法租界白尔路(今重庆中路)18号。

 

이 때 임시 정부 청사는 여러 장소로 이전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프랑스 조계에 설치되었으며, 프랑스 총영사가 묵인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간판을 걸도록 허용하지는 않았다. 임시정부가 설립된 후 그 정부는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간판을 며칠 간 달았다. 따라서 상하이 신문 <신보>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기사를 게재하고 공식화했다. 이 문제는 곧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주의를 끌었는데 그들은 불만이었다. 일본 영사관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 조계 경찰서는 임시정부에 48시간 이내에 건물을 비우고 모든 인원이 철수할 것과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을 중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그것은 그 신문이 [총독부의] 비밀 정보를 수입해서 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첫 정청인 하비로 321호에서 나와서 프랑스 조계 안 백리로(현 중광중로) 18호로 이전했다.

 

이것은 현재 중국의 여러 웹 페이지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의 한 예에 불과하다. 중국에서는 하비로 321호에 첫 청사가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웹페이지에 있는 주소 관련 내용을 수정하고 추후 연구와 조사를 통해 청사의 위치를 고증하기 바란다.


------------

보충 2017년 12월

내 글을 보고 추가 연구한 오광택 박사가 보내준 논문 요약   


상해 임시정부청사 소재지의 변천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① 김신부로(보창로 329) 1919년 3월 상순~4월 11일 (16)

한일관계사료집 4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김정명편 명치백년사업서조선독립운동도산 안창호등 앞의 p13 표참조

의정원 구성및 회의정부조직 및 각원 임명


② 하비로(露飛路) 460. 1919년 4월 17

김정명편 명치백년사업서조선독립운동Ⅱ 민족주의운동편 p3

임시정부 직무시작불란서총영사관 공식발표임시정부간판 불허.


③ 조계 고내의로(高乃依路)11. 1919. 4.29~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p24

김정명편 명치백년사업서조선독립운동Ⅱ 민족주의운동편

300원 임차


④ 조계 장안리267 민단사무소. 1919. 4.30~7.19

한일관계사료집 4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p23

김정명편 명치백년사업서조선독립운동Ⅱ p34

곽명수 명의 임차

임시의정원(4회 5)와 임시정부가 함께 이용 됨


⑤ 조계 장안리 민단사무소. 1919. 8. 18~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p53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p57

임시의정원와 임시정부가 함께 이용 됨


⑥ 조계 하비로露飛路) 321. 1919. 9.17~

일본외무성육해군성문서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 p54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p58

임시의정원와 임시정부가 함께 이용 됨

정부청사는 안창호가 찬조금 25천불 중 임차하였음

 

필자는 문헌을 통해 상기의 자료에서 임정 청사 변천 과정을 확인하였다한시준 교수의 한국근현대사연구연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이전지 현황은 같은 내용으로 상해의 임시정부 청사 소재지에 관한 고찰” 이란 기고문에서 하비로(보창로) 309호 1919년 9월 이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으나 의문이 있다


본문(기고문p335) 인용 보창로는 하비로의 전 명칭으로 같은 거리 이름이다. “하비로(보창로) 309호가 임시정부청사였다는 것은 이광수의 회고와 대한민국임시의정원문서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보이는 임시정부청사 사진을 근거로 하여 필자(한시준)가 추정한 것이다” 이광수의 회고록 도산은 일단 취임한 일에 전략을 다하였다그는 첫째로 미주 국민회로 부터 2만 5천불을 갖다가 불란서 조계 로비로(露飛路)에 정청을 차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정무(政務)를 보았다.” 한시준교수의 추정을 다시 살펴보면이광수와 박은식은 사료집 편찬에 관련된 자로서 사료집 4권에 보창로 329호가 기록 되어 있으며보창로 309호는 329호를 잘못 기록 하였거나도산 안창호와 2만 5천불과의 관계는 보창로 321호와 관련된 내용이다또한 오천균 저 “ 한국임시정부의 민족교육운동사” 집문당 1992. p45에는 보창로 329호가 1919년 8월 11일자에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다다시 본인의 추정으로 보면 보창로 309호는 329호가 잘못 기록 것 같다.

 

-----------

이후 한국에서는 임정 청사 건물의 역사를 위와 같이 정리하게 되었다. 2016년 2월에 내가 문제를 제기했고, 이 분야 전문가들이 바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