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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1919-1921 상해한인교회

A. 1919년 상하이에 한인교회가 있었을까?

다음 <독립신문> 1919년 12월 27일 성탄 행사 기사에 의하면, 조계지 북경로에 있었다. 피치(Gorge Field Fitch)목사가 주선해 준 베이징루(北京路) 18호에 위치한 ‘북경로 예배당’이었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이것이 1921년 프랑스 조계지 안 '삼일당'으로 옮겨 가게 된다. 

 

https://search.i815.or.kr/subService.do
1920년 상하이 지도에서 북경로를 확인해 보자.

남경로(Nanking Road)가 번화가였고, 그 위에 북경로(Peking Road)가 있었다.  한인 교회는 이 거리 어딘가에 있었다. (추가 조사 요)

1920년 상하이의 모습이다. 

 

B. 1920년 말 교인 수와 지도자는?1920년 말 남녀교인 183인 --- 세례교인 120인직원은 임시목사 1인, 집사 2인, 권찰 4인, 위원 6인. 

1921년 1월 새로 집사 2인과 권찰 1인 선출

목사는 김병조(金秉祚) 재임되고, 집사는 전임 김봉연, 한진교 재선, 선우혁, 김순애 신임

교인 중 학생 남녀 13인, 구미에 여행 중인 자가 남녀 20인, 사망자 1인

C. 김병조 목사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해로 탈출하여 임정에 합류했다. 정주 장로교회 목사. 191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상해 한인교회 초대 목사가 되었다. 

김병조 목사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알려져 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3%91%EC%A1%B0_(1877%EB%85%84)

 

D. 상해의 다른 종교인들과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회, 1921년 2월

예수교인이 가장 많았으나, 천주교인, 천도교인, 대종교인도 각각 모이고 있었다. 1921년 2월 10일부터 1주일 간 이 네 종교인들이 함께 모여 독립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예수교인들은 매일 7-80명이 새벽 5시에 기도회로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다. 이 기간에 주간에는 사경회로 모였다. 77명이 참석했다. 한국의 설 사경회 전통대로,  상해에서 1921년 나라를 위한 새벽기도회와 사경회를 동시에 연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천도교인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 보강리 15호 성화회 실내엣 매일 오후 9시에 모였다. 신문에는 기도문이 실렸다.  

E. 1921년 삼일당으로 이전

국가보훈처나 독립기념관 온라인 자료는 삼일당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http://oversea.i815.or.kr/country/?mode=V&p=1&l_cd=china&area=ARA013&m_no=2-01-13-0008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을 전후로 다수의 한인들이 중국 상하이(上海)로 이주하거나 망명했다. 이주 한인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보다 용이하게 현지에 안착할 수 있었다. 한인 기독교인들은 상하이 한인을 위한 별도의 예배당이 없었던 이유로 서양 선교사가 세운 교회나 중국기독교청년회 건물을 이용하여 종교 활동을 전개했다. 스촨루(四川路) 중국기독교청년회사무실이나 미국해군청년회관을 통해 종교 활동을 전개한 것이 그것이었다. 상하이 한인 기독교인들은 1919년 발표된 독립선언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3·1운동 직후 다수의 한인들이 망명해오면서 기독교인이 증가했다. 신도가 많아지자 함께 예배할 장소가 마땅치 않게 됐다. 이에 피치(Gorge Field Fitch)목사의 주선으로 베이징루(北京路) 18호에 위치한 ‘북경로 예배당’을 이용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교민단 사무소를 예배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기독교인이 더욱 증가하고 교회의 규모도 커짐에 따라, 집회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됐다. 이에 프랑스조계 ‘西新橋 三一里’에 위치한 삼일당(三一堂)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됐다.


삼일당은 미국 전도국(傳道局)이 중국 기독교인을 위해 미국 감리교회에서 1879년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교당의 기능을 상실하고 1917년에는 중국인 소학교로 활용됐다. 1921년 한인이 이곳을 교당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부활절 주일부터 한인 기독교인들은 삼일당을 한인교회로 사용했다. 삼일당은 한인 전용 예배당으로서 종교 활동이 가능하였고,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야간에도 늦게까지 집회나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종교 활동 이외에도 인성학교의 학예회·졸업식, 국치기념일·건국기원절(개천절)·‘3.1독립선언일’ 등의 기념행사, 국민대표회의 촉진회 연설회·국민대표회기성회 총회 등의 국민대표회의 관련 행사, 순국 추도식과 환영회 등의 다양한 집회장소로 활용됐다. 삼일당은 본당인 모이당(慕爾堂)의 신축 비용 마련을 위해 1927년 택지를 팔게 됐다. 이후 삼일당자리는 철거되어 상가건물과 주택단지로 변용됐다.
삼일당은 예배공간으로 사용되면서 동시에 교민사회의 수많은 집회와 행사를 통해서 민족정체성과 공동체의식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곳으로 활용됐다. 상하이 한인들이 전용공간으로 종교 활동 뿐 아니라 공회당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마도 이것이 1921년 삼일당에 이전하고 찍은 사진이 아닐까 한다. (조사 요)

주 중에는 인성학교가 운영되고, 주일에는 예수교회로 사용되었다. 

1991년 현지 사진이나 건물 변경으로 알아보기 어렵다. 지금은 흔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