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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상하이 독립신문 옥중비화 5 "월야의 합창"

1919년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다음 다섯 개의 서대문 옥중 비화가 실려 있다.

1919.9.06[3면] - 獄中秘話(一)

1919.9.13[3면] - 獄中秘話(二). (五)는 오기이다.

1919.9.16[2면] - 獄中秘話(三)

1919.9.18[2면] - 獄中秘話(四)

1919.9.23[2면] - 獄中秘話(五)

다섯 번째가 다음에 오려 붙인 "월야의 합창"이다.

1919년 4월 중순[2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은 후, 세 명의 여학생이 밤에 서대문형무소 근처 산에 올라가 독립군의 용사를 기억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갇혀 있는 친구들을 위한 노래였을 것이다.]

조용한 밤이라 감방에 있던 독립군 용사들은 이 노래를 음미하며 끝까지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 중에 한 명이 노래가 끝나자 "아멘"이라고 하자, 이것이 신호가 되어 모든 수인들이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서대문 감옥이 흔들렸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의 혼이 살았다. 이후 간헐적으로 옥중 만세를 합창하는 밤이 이어 졌다. 

참고) 4월 23일 서울 시위: 출처: 국편 http://db.history.go.kr/samil/home/demons/select_demons_detail.do

개요
4월 23일 정오에 종로에서 국민대회를 열기로 한 계획에 따라, 당일 정오가 되자 사전 계획에 따라 자동차 탑승자가 보신각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지휘자들은 깃발을 흔들고 시내를 활보하면서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선포문’ 등 인쇄물을 배포하고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23일 정오 경에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4~5명이 작은 깃발 3개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질주하여 종로서 방면으로 향했다. 경찰이 뒤쫓자 작은 깃발은 종로통에 버리고 관철동 골목으로 도망쳤으나 4월 24일 2명이 체포되었다. 작은 깃발은 목면으로 2개는 국민대회라고 쓰여 있었으며 하나에는 공화만세라고 묵서되어 있었다. 4월 23일 종로통에서 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파리에서 조선의 독립이 확정되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고 말하는데다 경계가 엄중한 시장 안에서 백주에 국민대회라고 쓰인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일반 상민 중에는 조선의 독립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는 4월 초에 인천에 대표자들이 모여 기획한 것이었다. 
1919년 4월 2일 인천부 각국[민국]공원에서 한남수, 박용희, 장붕, 김규, 이종욱,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은 국민대회를 열고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일반에게 선포하기로 협정했다. 그것은 조선국민대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을 망라하는 조선임시정부를 설립하려는 시도였다. 4월 3일 안상덕은 상해의 홍진의를 홍면희, 이규갑에게 소개하고, 이어 이규갑, 김규의 권유로 이헌교, 이민태, 윤이병, 이용규 등이 참가했다. 한남수는 상해와의 연락을 위해 4월 8일 경성을 출발하여 이후 업무는 이규갑, 홍면희 등의 주도로 추진됐다. 이헌교는 유생 이성수, 최전구를 권유하고, 김사국은 김유인 등과 접촉하며 전협, 이동욱, 현석칠 등과 협의했다. 이동욱이 ‘국민대회취지서’, ‘임시정부선포문’을 집필했고 현석칠이 목판애 번각하여 6000매 가량을 인쇄했다. 김사국, 김유인 등은 국민대회 실행을 위한 구체적 업무를 추진했다. 4월 19일 김사국은 안상덕, 현석칠에게 각각 600원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튿날 민강을 통해 안상덕이 지원한 500원의 일부를 받아 김유인에게 지급했다. 김유인의 의뢰를 받아 장채극은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臨時政府領)’ 제1호 제2호 문서를 4월 20일부터 22일경까지 등사판으로 약 1500매를 인쇄하게 했다. 또 22일에는 장채극에게 23일 국민대회 개최에 따른 절차와 행사 내용 및 필요 준비 사항을 전달했다. 장채극은 전옥결, 이철과 협의하여 자동차 탑승자, 만세 주창자, 노동자 지휘자, 간판 게양자 등 선정하고 ‘국민대회취지서’,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 제1호와 제2호 등 유인물 정리와 배포를 위한 교부, 국민회의와 공화만세라고 쓴 깃발과 간판 제작 등 준비를 마쳤다. 
4월 23일 장채극, 김유인은 자동차 탑승자 3명에게 깃발와 유인물 약 10부씩을 교부하여 배포하게 하고, 장채극은 지휘자 3명에게 깃발을 교부하고, 강우열, 김병호, 유기원, 김홍식 등에게 유인물 각 350매씩 교부하여 정오 경에 시내 각처에 배포하게 했다. 정오 무렵 자동차 탑승자는 보신각 앞에서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지휘자들은 깃발을 흔들고 시내를 활보하면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강우열 등 학생들도 유인물을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장채극, 전옥결은 국민대회 간판을 서린동 봉춘관으로 가져 가서 이철이 데리고 온 전철백과 주병봉에게 부착하고자 했으나, 대표자들이 도착하지 않아 게양을 하지 못했다. 경성 서대문정에 사는 이관우는 4월 23일 정오에 경성 종로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4월 22일 밤에 권농동의 윤화병, 내자동의 윤정식, 평동의 변봉수, 주교정의 김종환, 왕십리의 정준식 등의 집을 찾아가 다음날인 23일 정오 경성부 종로에서 국민대회가 개최되어 학생, 노동자가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이니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권유했다. 윤화병은 이관우의 권유를 받고 찬성하여 김종환, 정준식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4월 23일 정오 무렵 이관우는 종로에 가서 남대문 방면에서 국민대회라고 묵서한 깃발을 가지고 학생 여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