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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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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통합 합동 분열 자료: 4월 11일 총회 해명서 해명서: 1959. 4. 11 1958년 총회 후 승동교회에서 양자 교회 평화를 위한 방안 모색 후 합의서 발표
1959 통합 합동 분열 자료: 8월 7일 호남 노회 반WCC 성명서 호남 10개 노회 (150명 목사) WCC 철회 선언
1959 통합 합동 분열 1 올해 2019년은 예장 통합과 합동이 분열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 문제를 대충 거론해 보려고 한다. 갈라진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향후 연합도 생산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60년 환갑이 지났으니 다시 논의하면서 연합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자. 가장 문제가 되는 두 가지로 거론된 것이 1) 박형룡 박사의 3,000만환 로비 사건과 2) WCC 파와 NAE 파의 신학적 대결이었다. 전자가 분열의 실제적인 이유였다면, 후자는 신학적 명분적 이유였다. 일단 3,000만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0 모든 글에는 3,000만환을 거론한다. ..
1941 토왜 목사 곽진근: 신사참배 독려 40대에 총회장이 되었으나 급사 곽진근(郭塡根, 일본식 이름: 牧野道雄, 1897-1941) 전북 김제 출신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 불(W.F. Bull 부위렴)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만경보통학교, 전주농업학교를 거쳐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1924년에 졸업하고 전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완주의 삼례읍교회, 김제의 금산교회, 원평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1937년 정읍의 신태읍교회, 화호교회로 옮겨갔다. 조선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는 서기를 맡으며 장로교단 내에서 입지를 쌓아갔다. 1938년 화호교회 당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전북노회에 신사참배 결의안을 제출하는 등 신사참배 강요에 앞장서서 동조한 목회자였다. 전북노회는 곽진근의 건의를 받아들여 헌의했으며, 결국 1938년 9월 제2..
1922 상해조선인예수교회 장정과 치리 다음은 기미년 삼일운동 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진 후 3년이 지난 즈음 상해에 설립된 상해조선인예수교회가 만든임시 장정 전문이다. 1922년 4월 26일자. 교회 헌법을 제정하여 교인들에게 포고했다. 1조 교회 조직 2조 교회 교인 3조 교회 직원 4-8조 치리와 권징 9조 타지 교회들(소주, 남경, 천진)에도 이 장정을 일체 시행 10조 장정 변경 가능 ​ 여기서 교회 장정의 대부분이 치리와 권징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법은 치리와 권징이 주가 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 8조에 규정한 권징 대상자를 보자. 1. 계명을 범하는 자 [십계명을 범하는 자] 2. 잡기(노름 등)하는 자 3. 아편 장사하는 것과 아편을 먹는 자 (아편연을 피우는 ..
1938년 6월 초의 신사참배 진행 상황 한 선교사가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편지이다. 누가 보낸 글인지 찾으면 올리겠다. 초록색 박스 안에 현재 조선장로교회 안에서 진행된 각 노회별 결정과 궁성요배(천황숭배), 신민 서사 제창,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관련 실천 양상이다. 일단 동방요배는 살아 있는 천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거의 모든 교회와 목회자들이 동의하고 실천했다. 신민서사 암송이나 일장기 경례도 수용했다. 그러나 기실 엄격한 잣대로 보면 황제 숭배는 로마 시대나 1930년대 말이나 현현신에 대한 숭배(예배)였기에 신사에 가서 절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기미가요를 부르고 군주의 치세는 천대부터 팔천대까지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황국신민 맹세를 했다. 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
임정은 삼일절이나 임정수립일을 건국일로 기념했는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질문 1. 1920년 3월 1일부터 임정은 삼일절을 어떤 경축일(국경일)로 기념했나? 질문 2. 1919년부터 개천절은 어떤 경축일로 기념했나? 2번부터 보자. 1919년 11월 27일자 상해 독립신문이다. 11월 21일(음력 10월 3일) 삼일당에 모여 건국기원절을 경축했다. 대종교인들이 주최했지만 동포들이 함께 참석했다. 민단 총무 양제헌 사회로 애국가를 합창하고, 박은식, 조완구, 안창호의 연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도 다 한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므로 이 날을 경축해야 한다고 믿었다. 안창호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合하면 立하고 分하면 倒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래 1920년 달력에서 2번 독립 기념일에서도 개천절을 양력..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상해 임시정부 첫 청사는 어디에 있었나?] 잊혀진 설립일과 첫 정청[청사]의 위치옥성득 2016. 2. 15. 14:54 현재 상하이에 새로 꾸민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된 작은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프랑스 조계 안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할 당시 사용한 첫 정청(청사)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 첫 청사에 대해서 독립기념관에서 조사해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본래 위치나 주소를 잘 모르는 듯하다. 자료 1. 현재 독립기념관 웹 페이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2116) 임시정부 청사 보창로 309호◎ 옛주소 : 상해시上海市 불조계佛租界 보창로寶昌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