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건

(55)
1919 3 10 예수교 여학생들이 만국평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한민족 독립선언, 세계에 전해 달라” 3·1운동 직후 기독 여학생, 윌슨 대통령에 호소의 편지, 1919년 3월 10일국민일보 2019년 3월 1일 자에 다음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내용에 이 편지가 윌슨 대통령과 세계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으나, 1) 뉴욕에서 발간되던 기독교 주간지 The Christian Herald 6월 28일 자에 보도되었다. 2) 미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 박사기 8월 22일에 늦게 수령한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서울의 이화학당 학생들이 썼을 가능성이 높고, 감리회 여선교사가 타이핑을 해서 북감리회 본부에 보냈고, 신문 보도 후에, 그 사본이 브라운에게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따라서 만국평화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고 ..
스코필드 의사와 매큔 박사, 1919 삼일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서울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의사(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2일)와 선천 신성학교 교장 매큔 (George Shannon McCune 尹山溫,1873. 12. 15-1941. 12. 7) 박사 Dr. Scofield of Severance Hospital and Dr. Goerge S. McCune of Seoncheon 34인으로 불리는 스코필드 의사는 일제 만행을 사진으로 찍어 전 세계에 알렸다. 매큔 교장은 1919년 3.1운동 때 시위 참가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 일로 인해 그는 1921년 추방 당했다. 1929년 5월 제4대 학장으로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19 Open Letter by the (Christian) Women of Korea 朝鮮婦女泣告世界婦女 Open Letter by the Women of Korea , 1919 朝鮮婦女泣告世界婦女한국의 기독교인 부인들이 세계 (기독교계) 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영문판에 우리는 한국 기독교인 부녀들이라고 밝히고 있다.)4월 17일의 제암리사건을 언급하고 그 사진을 게재한 것으로 보아 1919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원고가 완성되어 5-6월 중으로 상하이에서 인쇄된 듯하다. 사진은 거의 세브란스병원 캐나다 장로회 선교회 의사 스코필드가 찍은 것이다. 삼일운동으로 조선 여성들이 겪는 수난을 글과 사진을 고발하는 편지로 현재 프린스턴신학교에 소장.1919년 4월 말까지 2,000여 명의 소녀들이 감옥에 있으며, 고문을 당했으며, 여러 명이 단순히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총과 칼에 맞아 죽고 중상을 입었다고 고..
1919년 3월 2일 일요일 안식교회 교인들 만세 시위 1919년 3월 2일은 일요일그래서 3월 1일 토요일이 거사일로 결정되었고, 1일 시위가 일어난 서울, 평양, 의주, 선천, 진남포, 원산 등지에서는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하는 가운데 집회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주일 예배도 드릴 수 없었고, 만세 시위도 거의 없었다. 다만 3월 2일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의 안식교회당(安息敎會堂)에서 기독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진 다음 날인 3월 2일 평양과 인접한 대동군 용산면 하리에서 기독교인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리에는 기독교의 한 갈래인 안식교의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교회 전도사인 박종은(朴鍾恩)은 3월 1일 평양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군중을 모아놓고 조선 독립에 관해 연설하기도 하였다. 3월 2일..
1919년 5월 "만국 예수 교우에게" 기독교인 11인의 탄원서 1919년 5월 "만국 예수 교우에게" 대한국 예수교인 11인의 탄원서일본 군국주의의 쌓인 압제와 불법에 항거하고 -----세계 공론에 의지하여 자유와 독립을 위해 삼일 만세 운동을 했으나, 일제 경찰과 군인은 살생과 구타에 여지 없다.-----경향 각지 감옥에 설 틈이 없을 정도로 인민을 착수하되 어린 아이와 부녀자까지 능역과 악형을 가하고 있다. -----교회당과 학교를 불살랐다.----우리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고 도덕적 원조를 해 주시기를 바란다. 목사 안승원, 손정도, 장덕로, 김동조, 조상섭, 배형식, 장로 조보근, 김시혁, 김승국, 장붕
세속 성자의 의미 개인戰에서 전면戰으로“하나님이 종교개혁 시대에 자신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해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의 복음을 다시금 일깨우셨을 때, 루터로 하여금 수도원을 거쳐 가게 하셨다. 루터는 수도사였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순종하면서 따르기를 원하였다. 수도원으로의 부름은 루터에게 그의 전 생명을 걸게 하였다.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서 실패하였다.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그에게 보여주신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이 특별한 개인의 공로적인 행위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뒤따름의 겸손한 활동이 수도원에서는 특별한 자들의 공로 행위로 변질되고 말았다. 여기서는 뒤따름이라는 자기 부정이 경건한 자들의 영적인 자기 드러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시작작년 여름 작성에 참여한 DB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삼일운동에 대한 1차 자료를 마음껏 볼 수 있다. http://db.history.go.kr/samil/
1919년 3월 1일 총독부 시위 보고서 극비 대정 8년(1919) 3월 1일 총독부 경무국 고제5410호 "독립 운동에 관한 건 (제2보)"1. 경성 2월 28일 밤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조사 중에, 3월 1일 오후 5시 반에 서명자 33인 중 29인 체포. 오후 2시 반 경 학생 3-4천 명이 종로에 모여 일부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안문으로 가서 독립연설을 하고, 일부는 경성우편국 앞에서 만세 시위를 한 후 남대문역으로 가면서 만세 시위를 한 후, 역에서 프랑스영사관 쪽으로 행진했다. 대한문 군중은 미국영사관으로 가면서 만세를 불렀고, 3,000명 시위대는 총독부를 향하다가 본정에서 저지당했다. 형세가 위중하여 용산 사령부에 연락하여 보명 3개 중대와 기병 1개 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2-5쪽)남대문역에서 보성전문학교 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