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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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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1 상해한인교회 A. 1919년 상하이에 한인교회가 있었을까? 다음 1919년 12월 27일 성탄 행사 기사에 의하면, 조계지 북경로에 있었다. 피치(Gorge Field Fitch)목사가 주선해 준 베이징루(北京路) 18호에 위치한 ‘북경로 예배당’이었다. 아래에서 밝히겠지만, 이것이 1921년 프랑스 조계지 안 '삼일당'으로 옮겨 가게 된다. https://search.i815.or.kr/subService.do 1920년 상하이 지도에서 북경로를 확인해 보자. 남경로(Nanking Road)가 번화가였고, 그 위에 북경로(Peking Road)가 있었다. 한인 교회는 이 거리 어딘가에 있었다. (추가 조사 요) 1920년 상하이의 모습이다. B. 1920년 말 교인 수와 지도자는?1920년 말 남녀교인 183인 -..
상하이 독립신문 옥중비화 5 "월야의 합창" 1919년 상하이에서 발행된 에는 다음 다섯 개의 서대문 옥중 비화가 실려 있다.1919.9.06[3면] - 獄中秘話(一)1919.9.13[3면] - 獄中秘話(二). (五)는 오기이다.1919.9.16[2면] - 獄中秘話(三) 1919.9.18[2면] - 獄中秘話(四) 1919.9.23[2면] - 獄中秘話(五)다섯 번째가 다음에 오려 붙인 "월야의 합창"이다.1919년 4월 중순[2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은 후, 세 명의 여학생이 밤에 서대문형무소 근처 산에 올라가 독립군의 용사를 기억하는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갇혀 있는 친구들을 위한 노래였을 것이다.]조용한 밤이라 감방에 있던 독립군 용사들은 이 노래를 음미하며 끝까지 듣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 중에 한 명이 노래가 끝나자 "아멘"이라고..
"여학생의 애국 정신,' <독립신문> (상하이, 1919년 11월 20일) 한 여자 선교사, "여학생의 애국 정신,' (상하이, 1919년 11월 20일)삼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 구금되어 고문과 온갖 악형을 당하고도 법정에서 당당히 독립의 당위성을 말한 여학생들.독립운동에 남녀 차별이 없다; 한국 사람으로서 독립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독립은 한국, 일본, 세계 행복과 평화에 도움이 된다; 합병 이후 차별과 핍박을 하고 동화시키기 위해 한국 역사와 언어를 금지하는 식민지 정책을 썼다; 그러나 한국인은 동화되지 않으며 한국인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나라는 우리가 다스려야 한다.
1908 이승만의 연설에 나타난 한국 부흥 운동 평가와 기독교 국가론 1908년 3월 10일 이승만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모인 The first International Convetion of the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Interdenomination Conference 초교파청년선교운동대회 산하 제1회 국제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연설의 제목은 "Korea's Humiliation, Christianity's Call"이었다. 영문 자료는 2007년 내가 제공하고 편집했다. 당시에는 원문이 실린 자료를 찾지 못하고 서울에서 발행된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영문을 실었다. 한글 번역은 장신대 서원모 교수가 책임졌고, 내가 수정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07)로 출판된 책이다. 번역문은 아래에 있..
고문은 태형과 다른 여러 가지 1. 다음은 1912년 3월 총독부가 제정한 조선 태형령이다.조선 시대 고문과 형벌의 일종이었던 태형을 부활시켰다. 이 법은 1919년까지 존속되었기 때문에 삼일운동 체포자와 수인에게 태형으로 고문하고 처벌했다. ​조선 태형령제령 제13호, 1912년 3월 18일 공포 1912년 4월 1일 시행제1조 3월 이하의 징역 또는 구류에 처해야 하는 자는 상황에 따라 태형에 처할 수 있다.제2조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에 처해야 하는 자가 다음 각 호의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태형에 처할 수 있다.1. 조선 안에 일정한 주소가 없는 경우2. 자산이 없다고 인정된 경우제3조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를 언도받은 자가 그 언도 확정 후 5일 내에 이를 완납하지 않은 경우 검사 또는 즉결 ..
1919년 3월 3일 (월) 발표된 기도 요청과 읽을 성경 구절 1919년 3월 3일 (월) 발표된 기도 요청1. 주일에는 금식하며 기도하세요.2. 어디에 있든지 아침 6시, 정오, 저녁 7시에 기도하세요.3. 깨끗한 마음으로 매일 다음 성경을 읽으세요.3월 4일 (화): 야고보서 1장; 5장 13-20.3월 5일 (수): 이사야서 59장 1-21.3월 6일 (목): 로마서 8장 시작하는 날: 에스더 3장 -10장, 황금 구절은 4장 13-17절.3월 1일: 사도행정 12: 1-253월 2일: 예레미야 12장3월 3일: 신명기 28:1-14; 마태 5:43-48, 마태 6: 30-34.
1907 Clark's letter to Friends [발굴] 1907년 3월 1일 클라크(Charles Allen Clark)가 미국 친구들에게 보낸 정기 선교 서신1907년 2월 18일부터 며칠 간 서울 승동교회 길선주 사경회에서 성령 강림하여 회개 이어짐.모든 기독교인들 회개하고 정화되고 새롭게 됨, 정신 여학교 학생들도 성령 체험하고 회개.길선주 장로의 귀신 추방을 보고, 신학교 때나 1906년에 읽은 네비어스의 보고도 믿지 않았던 귀신 들림과 귀신 추방이 사실인 것을 믿게 되었다. 부흥의 결과, 교인들 전도 날연보와 헌금하게 되었다. 1인 평균 17일 날연보를 드렸다. 밀러나 에비슨 등 선교사의 하인들이 돈 훔친 것 회개했다. 서울에 성령께서 강림해서 여러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비록 몇 사람이 죄를 끌어 안고 끙끙대며 고백하지 못했으나, 비참함을 ..
1919년 설립된 시카고한인감리교회에 1923년 김창준 목사 부임 시카고 한인 감리교회, 19191919년 8월에 설립된 시카고 지역 최초의 한인교회이다. 위와 같이 Korea Review(『한국평론』) 1919년 12월 호에 실린 사진에는 약 40명이 모여 있다. 1919년 당시 시카고 지역 한인들의 수가 대략 40∼50 명 정도로 거의 모든 한인들이 이 교회 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대 목사로 최 N. Y.(조사 요)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1923년 9월 시카고한인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설립되었다.설립에 앞장 선 인물들은 강영소, 김경, 김원용, 박장순, 염광섭, 차의석 등이다. 1923년 이들은 3·1운동 당시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김창준(金昌俊) 목사를 초빙해 예배를 드렸다. 1927년 5월 8일 레이팍 애비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