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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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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삼일절 좀비와 삼일절지난 10년 간 좀비 영화는 그 이전과 달리 잠재적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희망마저 사라진 21세기 종말 후기 사회에서, 모두 강시가 되어 악의 진부성(banality), 생의 무의미성, 미래의 부재를 받아들이며 하루를 꾸역꾸역 산다. 난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단추를 눌렀을 뿐, 가스실에서 죽어 간 수 만 명을 내가 죽인 것은 아니다. 그저 까라고 해서 깐 것뿐이다. 허나 “No”라고 말하는 소수의 좀비가 생존하여 언덕을 넘어가고 ‘부산행’에 성공한다.개혁과 혁명이 불가능한 세상, 후천개벽도 하나님 나라도 무의미한 단어가 되어 버린 2019년의 상황에서, 매달릴 일은 “스카이 캐슬” 헛된 성의 연장, 학벌과 재벌과 권력벌 축적이다.그러나 sky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1919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 [이 한 장의 사진]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인 대표단과 아인슈타인. 오른쪽 앉은 이가 김규식.다음 필라델피아 한국인 유학생회가 발행한 잡지에 실렸다.이 월간지는 삼일운동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자료이다. 1면에 헐버트의 글이 실렸다.
1919 숨어 있는 선교사 [삼일운동과 선교사의 사전 참여 문제] 숨어 있는 선교사 일제 경찰은 기독교인 시위 뒤에는 선교사의 지시, 가르침, 도움 등 직접 연관이 있다고 믿고, 평양 숭실의 모우리를 구금하고 2주일간 심문했다. 대부분 선교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선교사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하고, 시위를 계획하고, 연락하고, 시위를 주동하는 행동대원이었으며, 시위 후에도 선교사 집에 숨어 있었기에, 그 관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왜 일제는 그 연관성을 밝히려고 그렇게 노력했을까?선교사들은 이구동성 시종일관 그 연관성을 부정했다. 사전 인지를 극구 부인했다. 왜?요즘 기독교인들은 삼일운동과 선교사와의 연관성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선교사가 제국성을 벗고 민족성을 가진다고 보는 모양이다. 어제 피디도 나에게 심증을 넘어 다른..
1949. 3. 1절 30주년 김구 주석의 기념사 조선일보, 1949년 3월 1일자 우리는 이제 三十周의 三·一節을 마지하게 되었다. 도라보건대 三十年前 이 날은 우리 조국이 倭敵의 暴壓과 搾取 下에서 可憐한 同胞들이 膏血을 빨리고 生命까지 빼앗긴 일은 있었지만 少數의 倭敵의 走狗를 除하고는 同族끼리 殺害한 일은 없었든 것이다. 우리는 倭敵을 打倒하고 祖國의 自主獨立을 奪還하자는 가장 勇敢하고도 가장 革命的인 目的을 爲하여 全 民族이 一致團結하여 共同爭鬪하였든 것이다. ​[중략]嚴肅한 良心이 命하는대로 愛國愛族의 三一精神으로써 完全 自主의 獨立祖國을 再建하기를 또 한 번 새롭게 決心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決心을 實現하기 위하여 平和的 手段으로써 祖國의 統一 獨立을 完遂하자. 우리가 政治上의 獨立을 達成하여도 經營上의 破滅을 謀免하려 하여도 唯一..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 1919년 3월 1일 첫 독립 만세를 부른 곳은 평양3월 1일 만세 시위지는 일곱 곳뿐이었다. 시간대 별로 보면 평양 1시에 이어 2시에 서울, 선천, 의주, 진남포, 원산, 5시에 안주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참가한 인원은 평양 3,000 여 명, 서울 3-4천명, 선천 1,000 여 명, 의주 1,000여 명, 원산 7,8백명, 진남포 500여 명, 안주 170-180명.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회 5(평양, 선천, 의주, 안주, 서울), 북감리회 3 (평양, 진남포, 서울), 남감리회 1(원산) 등이었다. 함흥(캐장)은 1일 거사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2일에 시위가 발생했다. 따라서 평안도 평양-안주-선천-의주 지역 북장로회 교인들이 3,200명(평양 1,000 이상+ 선천 1,000 + 의주 1,00..
3.1운동과 태형과 평양 신학생들 십자가 태형 1912 조선 태형령이 부활되었는데, 이는 105인 사건 때 구속한 자들을 고문하기 위해서 였다. 이 고문형은 1919년까지 폐지되지 않아, 3.1운동 시위 참여자로 체포된 자들은 모두 태형에 처해 졌다. 30대, 40대, 60대, 90대 등에 처해 진 자들이 많았고, 이어서 징역 6개월, 1년, 2년 등으로 처벌을 받았다. 감옥에 보내지지 않고 마을 단위로 태형 처벌을 받은 사례도 있다. 충남 아산군의 도고면과 선장면에서는 192명이 태형 40 혹은 60을 받았다. 다음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의 경우이다. 1919년 삼일운동 시위 참여자 수 천 명 십자 형틀에 묶고 태형 30대로 고문을 시행했다. 평양에서 신학생 몇 명은 태형 후 십자가틀을 매고 거리에서 끌려다녔다 ​ 1. 다음은 1912년 3월 ..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 대한독립만세 선교사들은 여러 지역의 삼일운동 목격담을 이런 보고서로 132 쪽을 만들어 뉴욕 등으로 보냈다. 여기에 올린 부분은 그 첫 부분으로 1919년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열린 장로회 교인들의 독립 만세 장면을 보고한 번하이젤 선교사의 보고서 앞 부분이다. 이 부분의 설명에 대해서는 김승태, "평양에서의 삼일운동과 김선두 목사"를 보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98?category=818327 위 부분을 타이핑 transcription하면 다음과 같다. The Independnece Movement in ChosenPyeng Yang, Chosen, March 1st, 1919 This has been a memorable day in the history ..
1919 의주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 유여대 목사의 평양 장신 졸업 때 모습, 1915년의주 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 선언식을 주재한 사람은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유여대(劉如大) 목사였다. 순서는 (1) 찬미가, (2) 기도, (3) 식사(式辭), (4) 선언서 낭독, (5) 독립 창가 합창, (6) 만세, (7) 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식장에는 운천동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許尙璉)이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 두 개가 세워지고, 종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