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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좀비와 삼일절

좀비와 삼일절

지난 10년 간 좀비 영화는 그 이전과 달리 잠재적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희망마저 사라진 21세기 종말 후기 사회에서, 모두 강시가 되어 악의 진부성(banality), 생의 무의미성, 미래의 부재를 받아들이며 하루를 꾸역꾸역 산다. 난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단추를 눌렀을 뿐, 가스실에서 죽어 간 수 만 명을 내가 죽인 것은 아니다. 그저 까라고 해서 깐 것뿐이다. 허나 “No”라고 말하는 소수의 좀비가 생존하여 언덕을 넘어가고 부산행에 성공한다.

개혁과 혁명이 불가능한 세상, 후천개벽도 하나님 나라도 무의미한 단어가 되어 버린 2019년의 상황에서, 매달릴 일은 스카이 캐슬헛된 성의 연장, 학벌과 재벌과 권력벌 축적이다.

그러나 sky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한발한발 다가오는 삼일절, 100주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식민지에서 독립을 외치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인가? 거대 재벌, 사법부 수장, 정치 실세들의 불의, 불평등, 억압을 비판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내 한 명이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는가? 그 모든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외친 대한 독립 만세였기에 정의로운 운동이었다. 모든 불가능과 불의에 대항하여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 평등, 민주, 공동 번영을 외쳤기에 삼일운동은 위대했다.

 

이완용과 윤치호는 말했다. 그것 해 봐야 소용없어. 안 되는 일이야. 불가능해.

수 십, 수 백, 수 만, 수 십 만, 수 백 만 민중은 외쳤다. 된다. 안 되어도 외친다. 불가능해도 옳기에 외친다.

 

현실 감각 대 정의 감각이다.

정세 판단 대 양심 선언이다.

실용 주의 대 실험 주의이다.

절망 수용 대 희망 선택이다.

차별 수용 대 평등 추구이다.

니까짓게 대 나혼자라도이다

니들이뭐해 대 함께하면된다이다.

3월 1일 서울 미영사관 부근 시위, 대부분 학생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