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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3.1운동 (1919)

1919 삼일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과 미국 언론 보도

삼일운동, 제암리 참변에 대한 미국 언론 보도

독립 반대한 <뉴욕타임스>와 한국 상황 널리 알린 테일러 AP 기자와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 의사


삼일운동에 대한 <뉴욕타임스> 보도를 먼저 검토하고, 이어 대표적인 학살 사건인 '제암리 사건'에 대한 여러 미국 신문 보도를 비교해 보려고 한다. 2014년 2월 27일 <연합뉴스>에 소개된 로버트 워드의 기사도 검토하여 제암리 사건을 재정리하려고 한다. 


1919년 3월 당시, 삼일운동에 대한 <뉴욕타임스> 입장

3·1 독립운동은 미국 언론에서 4월 말부터 보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전에 <뉴욕타임스>는 3월 20일 자 사설 'Egypt and Korea'을 게재하고 한국의 독립을 반대했다. 아마도 서울에서 3월 6일부터 <경성신보>와 <서울프레스>가 시위 사태를 보도하고, 일본어 신문들도 보도하기 시작해 이미 한국의 '소요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도는 아직 안 하고 있었다. 이 사설은 국내에 별로 소개되지 않아 전문을 사진으로 공개한다. 원본에는 기사가 두 줄로 길게 되어 있었으나, 오려서 세 줄로 만들었다.

 

▲ 1919년 3월 20일 자 <뉴욕타임스> 사설.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한국의 자치와 독립에 반대했다.

사설에서 이집트와 한국의 자치를 반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본국인 지도자들이 행정 경험이 없으므로 자치할 수 없다. 지식인 지도자들이 행정 경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둘째, 무정부 상태보다는 질서유지가 더 낫다. 각 나라의 무정부 상태는 지역 평화를 깨고, 이는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

 

따라서 사설은 결론적으로 "현재로서는 본국인 자치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면서, 개화된 외부자가 그 나라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최선이다"고 주장했다. 합방 이후 10년간 지속된 일본인들의 '조선 통치'에 대한 선전이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이 필리핀에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자치와 독립을 외치는 본토인 목소리를 수용하기 힘든 외교적 현실 가운데 놓여 있었다.

 

참고로 한국의 성공회나 천주교도 이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두 교회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반대하고 일본의 통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성공회 트롤로프 주교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서 신임 총독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강우규를 테러리스트라 비판했다. 역에서 사이토를 환영한 천주교의 뮈텔 주교는 강우규를 암살범으로 규정했고, 총독의 초청을 받아 몇 차례 만찬을 즐겼다. 뮈텔은 3월 1일 이후 시위 사태에 대해 비판하고, 23일 용산의 신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자 이를 진정시켰다. 6월 4일에는 서울 20사단 신인 사단장인 조호시의 환영식에도 참석했다. 종교인들 중 뮈텔이 가장 총독부를 지지하고 친일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뮈텔 주교 일기 6, 1916~1920> 참조]

 

<뉴욕타임스> 3월 30일 자에는 2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보낸 '대한독립위원회'가 베이징미국대사에게 보낸 청원서 전문을 실렸다. 이는 지린성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2월 10일 '대한독립선언서'(조소앙 작성, 한때 무오독립선언서로 잘못 알려진 것)를 인쇄하여 중국 각지와 해외에 발송한 후, 베이징에 있던 대한독립위원회(Korean Independence Committee) 위원들이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을 대표하여 주중미국대사에게 한글로 제출한 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일본에서 2·8 독립선언문이 있었다면, 중국에서는 독립의군부의 2·10 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그리고 이 청원서가 제출되었는데, 이 문건도 아마 국내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듯하여 전문을 올린다. 위원회는 미국 대통령 윌슨의 자결권 천명을 감사하고 이를 한국에 적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청원서는 역사적 상황을 개관하면서 일본과 한국의 합방 과정이 불법적이라는 사실과 일본의 통치 10년간 한국인이 비참한 일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두 번이나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이를 저버리고 합방을 강행했는데 이는 국제법 위반이다. 합방은 매국노 이완용 한 명의 뜻에 불과했으며 총칼 아래 행해진 강도질이었다. 합방 후 기독교인들은 특별히 탄압을 받았고 살해되었으며 갖은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했다.

 

설교를 위한 허가증이 필요했고 예배당을 짓기 위한 허가를 받아야 했다. 황실의 많은 농토는 일본 척식회사의 소유로 몰수되었고 한국인 농부 대신 일본 이민자에게 배분되었다. 한국인 농부들은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으며 추위에 수백 명이 굶어 죽었다. 일본 정부는 결혼 정책을 자유롭게 하여, 성 윤리가 무너지고 조혼이 빈번하고 10년 간 8만 건의 이혼이 발생했다. 일본인들이 한인 14~15세 소녀들을 중국 도시에 창녀로 팔았다.

 

총독부는 아편청을 만들어 아편 재배를 권장하고 중국에 밀수출했으며, 한국 청년들 다수가 아편에 중독되었다. 교육은 중학교 수준 이상을 금했으며, 선교사들이 세운 고등학교에 대해서는 규제를 강화했다. 합방 후 한국에는 도서 출판이 현저히 감소해 읽을 책이 적었다. 이런 '분서갱유'는 한국 문화 말살 정책이었다. 일본의 여러 만행은 각국 영사관과 선교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제 하늘의 섭리로 유럽의 1차 대전이 끝나고 윌슨이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는 시점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이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 <뉴욕타임스>, 1919년 3월 30일 자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 문건을 미리 받고도 보도하지 않았다. 3월 20일 사설이 실린 후, 한국에서 일본의 만행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청원서를 공개했다.

 

<연합통신> 테일러 기자, 제암리 학살 사건과 3·1 운동 보도

미국의 정책과 달리 한국 내 미국인 중에는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미국인도 많았다. 기자와 선교사들이었다. 1919년 4월 15일 발생한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은 <연합통신> 서울 특파원 테일러(Albert W. Taylor) 기자가 4월 23일 보낸 기사를 바탕으로 <뉴욕타임스> 1919년 4월 24일 자에 '일본군 한국인 학살'로 간단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테일러는 만세 시위 전날인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가 태어날 때, 한국인 간호원이 침대 아래 숨겨 놓은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일본 경찰 눈을 피해 이를 <연합통신> 동경지국으로 보내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제암리 사건도 취재하여 전 세계에 알렸다.

 

테일러는 학살 사건 다음날인 4월 16일 자신의 차(운전사 중국인 임씨)로 미국 부영사 커티스(Raymond S. Curtice)와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목사와 함께 현장을 1차 방문했다. [4월 21일자 커티스의 보고서는 김승태·박명수, "제암리교회 사건과 서구인들의 반응," <한국기독교와 역사> 7 (1997년 8월), 101~102쪽을 보라.]

 

이어 19일에는 영국 대리총영사 로이즈(W. M. Royds)와 함께 2차로 방문하고 조사했다. 이때 장로교회의 에비슨(O. R. Avison) 의사, 게일(J. S. Gale) 목사, 감리회의 하디(R. A. Hardie) 목사가 테일러 차에 동승했다. 모두 영국계(캐나다) 선교사였다. 그날 일본 감리교회의 스미스(Herron Smith) 목사, 지역 담당 장로사 노블(Noble) 박사, 케이블(Cable) 목사, 빌링스(Billings) 목사, 베크(Beck) 목사도 오토바이를 타고 방문했다. 로이즈도 주일영국대사관에 보고서를 올렸다. 이어서 프랑스 측도 조사하고 보고서를 올렸다.

 

외교관과 선교사들 보고서와 별도로 테일러를 통해 미국 신문에 삼일운동 관련 기사들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4월에는 평양 모우리 선교사의 체포 사건이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었다. 테일러가 보낸 일본 감리교회의 스미스(Herron Smith) 목사와 6월 1일 자 동경발 기사는 6월 5일 캔자스(로렌스, 웰링턴, 차누트, 허치슨), 텍사스(브라이언), 네바다(르노), 오클라호마(모스코기)의 신문 7개에 게재되었다.

 

6일에는 캔자스(위치타, 피츠버그), 미주리(세인트루이스), 뉴욕(로체스트), 노스캐롤라이나(하이포인트) 등 5개 도시의 신문으로 확산되었다. 두 달 동안 40회 정도 보도되었다. 보도의 중심지 캔자스 주에서는 17회로 거의 모든 도시의 신문에 실렸다. 한 예를 보자.

 

▲ <Lawrence Daily Journal World>, June 5, 1919


신문은 제암리교회에서 3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한다. 제암리 외에 3개 마을에서 교회가 더 불에 탔다. 영국영사 커티스나 미국부영사 로이즈의 보고서에는 37명 사망으로 나온다.


 

만세 시위 사진 촬영하고, 제암리교회 사건 조사한 캐나다인 의사 스코필드

세브란스병원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rank Scofield) 의사는 3월 1일 만세 시위가 발생하자, 탑골 공원 주변을 자전거로 돌면서 시위 사진을 몰래 촬영했다. 그는 시위 참가 중 부상한 중환자들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자 그들도 찍었다. 대부분 헌병과 군인들의 대검에 손발이 잘리거나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스코필드 의사는 가을에 쓴 세브란스 병원의 보고서에서 독립 선언으로 발생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4월 17일 제암리교회 사건 소식을 듣고, 18일 자전거를 가지고 9시 열차 편으로 수원까지 갔다. 자전거를 타고 사건 현장에 도착한 그는 사진을 찍고 조사하였다. 경찰은 그가 자전거를 준비한 줄 모르고 현장까지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는 18일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돕고, '수촌리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여름에는 한국의 실상을 일본 관리들에게 직접 설명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수상과 대담하고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서 충분히 토론했다. 그는 가루이자와와 고텐바에서 열린 선교사 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일본에 있는 동안 그는 일본이나 미국에서 출판하기 위해 한국 소요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책을 저술했다. 이 289페이지의 원고를 <Self-Determination of Koreans> 제목으로 1920년 뉴욕의 한 출판사에 보냈으나, 출판사가 원고를 소실하는 바람에 출판되지 못했다.

 

그 원고에는 아마 시위 현장, 시위 후 일본군의 경비, 부상자에 대한 사진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추측하기에 스코필드는 그 원고의 일부와 사진들을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에 몰래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판한 다음 소책자는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던 크로푸트(J. W. Crofoot)가 뉴욕에 보내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팸플릿에 실린 많은 사진들과 세브란스병원 입원 환자 사진들은 스코필드 의사가 찍었을 것이다.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 웹 페이지에 없는 다음 사진 한 장을 보자. 사진을 보면 세브란스병원 외과 간판이 보이고 오른쪽에 한국인 간호원이 보인다. 일본 군경의 대검에 왼팔을 잃은 나이 든 남자 환자가 치료를 받는 장면이다. 스코필드 의사가 아니면 찍기 어려운 사진이다.

 

▲ 이것이 '시혜적 동화' 정책인가?

 

스코필드 의사나 테일러 기자가 찍은 것으로 짐작되는 제암리 피해 상황이다. 집과 양식이 불에 타서 가을까지 '수원군 이재민 구호소'에서 양식을 배급받아 살아야 했다. 이 사진들은 잡지에 실렸다. 

▲ 제암리 피해 농가


 수원군 이재민구호소, 총을 멘 순사가 보초를 서고 있다. 


제암리교회에 대한 노블의 보고서

사건 후 수원 지방을 맡고 있던 북감리회 감리사 노블 목사가 연회에 보고한 내용을 보자. 

"제암리교회에서는 교인 23명이 학살되면서 생긴 공포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장면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고, 교회 예배 참석자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총 334명의 신자 가운데 173명이 죽거나 투옥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들은 다른 지역의 신자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 (중략) 그들은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주님께 진실하겠다'고 말한다." (Noble, "Report of Noble, Superintendent of the District of Suwon,"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9년)

 

 참변을 당한 마을과 부인들 (선교사들의 사진)


제암리 사건 다룬 1922년 <워싱턴타임스> 기사는 사실인가?

그런데 2014년 2월 27일 <연합뉴스>는 다음과 같은 1922년의 <워싱턴타임스> 기사를 발굴해 소개했다. 제암리 사건을 다루는 이 기사는 여러 언론에 소개되었고 지금까지 사실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내용과 상관없는 사진들과 소문을 사실처럼 소개하여 글의 신빙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Robert L. Ward, "Women Slain in Wholesale Executions As Japan Holds Korea in Slavery with Gun and Bayonet," <Washington Times> (March 5, 1922).

 

▲ 1922년 3월 5일 자 <워싱턴타임스> 기사.

 

미국인 사업가 워드는 1919년부터 3년 동안 극동 아시아에서 직접 본 일본의 만행을 한 달간 일요일판에 4회에 걸쳐 연재하며 일본과의 전쟁을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이 기사는 '일본이 총과 대검으로 조선을 노예로 삼고 있을 때 98명의 여성을 대학살했다'는 제목의 시리즈 두 번째 글이었다.

 

한국인이 일본의 폭정 아래 산업 노예가 되었으며, 도로, 학교, 무역, 법정 모든 영역에서 동경의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현재 일본이 비밀스럽게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도 당시 한국, 만주, 시베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이 황인종 독재자인 일본에 의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 전했다. 그 무자비한 폭정의 예로 자극적인 사진 두 장을 실었다. 이 신문을 본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들과 역사학 교수들은 기사 내용이 '간도 참변'과 수원 '제암리 집단 학살 사건'을 묘사한다고 보았다.

 

과연 그러한지 워드의 기사를 요약해 보자. 1904년부터 1921년까지 한국과 만주에서 벌어진 일본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1) 러일전쟁 후 1905년 일본이 총칼로 고종을 협박해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양위시키고 곧 강제로 병합했다. 2) 기미독립선언문의 일부를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3) 일본인이 법을 이용해 한국인의 산업을 적산 몰수하듯이 탈취하고 독점했다. 4)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고 목사 안수 허가제를 실시했다.

 

5) 출판물 검열 제도 강화. 6) 3년 전 제암리 사건 때 이십여 명을 교회 안에 몰아넣고 사살하거나 대검으로 죽인 후 기름을 붓고 불태웠으며, 접근하는 두 여자도 대검으로 찔러 죽였다. 7) 당시 다른 세 마을에서 3개 교회도 불에 탔다. 8) 3·1 운동 참가자들을 고문했는데, 손가락 중지에 줄을 묶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기도 했다.

 

9) 여학생 참가자들은 연행하여 옷을 벌거벗기고 모욕하며 고문한 후 성폭행했다. 10) 눈 가린 한국인들 약 1미터 거리에서 총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는데, 총살 후 살아 있는 자는 생매장했다. 11) 이 처형 장면을 내가 멀리서 촬영했는데,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직접 촬영한 것이다. 12) 수천 명이 투옥되었는데, 800명 정원의 한 감옥에는 2,100명의 정치범을 감금하고 있다.

 

13) 13개월 전(1921년 2월) 336명의 한국인을 한꺼번에 처형했다. 이는 독일군의 벨기에인 학살보다 더 처참했다. 살해된 자들 중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86명의 부인과 12명의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었다.

 

14) 2년 전(1920년 3월) 한국 거주 일본인들 사이에 미국이 한국 독립을 지지한다는 헛소문이 나돌았고, 일본인들이 반미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한 영국인이 미국인으로 인식되어 피해를 입었다. 15) 평양의 신학교 학생들은 체포되어 옷을 벗긴 채 무거운 십자가에 묶여 그것을 끌며 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일본군들은 "너희 아버지도 십자가를 졌으니 너희들도 같은 특권을 누려보아라"며 조롱했다.

 

16)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국정교과서에서 유럽의 자유 투쟁사를 모두 제거했다. 교육과정은 단축되었고, 외국 유학은 금지되었다. 17) 학생들에게 일요일에도 정부를 위해 일하도록 하여 교회 출입을 막았다. 18) 일본이 미국에 침략하면 한국과 만주에서 일어난 동일한 만행이 재현될 것이다.

 

12번까지 국내, 13번이 간도, 14~18번이 국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른 자료에서 보기 어려운 항목은 9, 10, 13, 14, 15, 17, 18번이다. 9번과 10번은 다른 자료로 확인하기 어렵고, 13번은 간도 참변(1920년 10~11월 만주 관동군과 조선 주둔 일본군 합동으로 간도의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면서 무고한 한국인을 약 3,500명을 학살한 경신참변)과 연관한 만행으로 보이나 장소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서술과 사진 가운데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11번이다. 사진을 확인해 보자. 워드가 목격하고 비밀리에 직접 촬영했다는 첫 번째 사진과 기사 내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진을 보면 검은 옷을 입고 눈을 가린 6명의 남자들을, 약 1미터 떨어진 곳에 선 군인들이 총으로 처형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가까이서 쏘는 이유는 사격술이 형편없기 때문이며, 시체를 처리할 관을 준비해 놓고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첫째, 처형되는 자들을 한국인으로 보기 어렵다. 검은 죄수복이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중국인들로 보인다. 둘째, 처형하는 키 큰 군인들을 일본군으로 보기 어렵다. 당시 중국군과 일본군의 군복이나 모자나 각반 등이 거의 흡사했기 때문에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그 차이를 미국 독자들이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만행이란 설명을 붙여도 의심하기 어려웠다.

 

일본군은 대개 총살형을 집행할 때 사형수들을 나무나 십자가 틀에 묶어 세워놓고 멀리서 여려 명이 사격해서 처형했다. 반면,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많은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중국군은 청일전쟁 때나 이후에 칼이나 총으로 근접 처형을 했다. (1937년 2차 중일전쟁 때에는 일본군도 근접 처형했다.)

 

셋째, 일본군은 처형 후 대개 관에 넣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 땅을 파서 묻었다. 따라서 사진1은 중국 군인들이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일 가능성이 높다. 기사 본문에서 처형 후 완전히 죽지 않은 자를 생매장 했다고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관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사진은 아마도 13번에서 묘사하는 '간도 참변'과 연관되는 것으로 실은 듯하다. 군사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가 목에 처형자 표식을 달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진 배경은 만주 심양성인 듯하다. 높은 성벽 앞 광장에서 중국식 검은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중국인 판사나 집행관으로 보이는 자가 역시 검은 중국옷을 입고 있는 중국인 죄수의 목에 표식을 걸고 있다. 이 죄인을 한국인이라고 볼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더욱이 그것이 간도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한국인 민간인 처형과는 상관이 없는 사진이다.

 

15번도 최소한 현재 알려진 자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만일 기사의 주장처럼 만세 시위에 참가한 신학생들에게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우고 거리에서 끌고 다녔다면, 십자가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한 사례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신문이 일본에 알려지자, 1919년 3·1 운동을 자세하게 보도했던 기독교계 영자 신문 <재팬애드버타이저>는 장문의 사설로 이를 반박했다. 사진의 군인들은 중국인이며, 한국인 살해 장면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후 한민족을 말살한 게 아니라, 10년 동안 인구가 1,300만에서 1,600만으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도 기독교 잡지 <기독교세기> 7월 13일 자에 평화 운동가 루시아 아메스 미드(Lucia Ames Mead)의 글 'America and Japan'이 실렸다. 미드는 워드의 기사가 허스트 재벌 소유 <워싱턴타임스>에 실린 배경과 이유를 설명한다. 당시 미국 독자들은 중국인, 한국인,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던 때이므로 반일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미국에서 일본인을 몰아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1920년대 초부터 태평양 패권을 놓고 경쟁 관계에 들어간다. 1928년 워싱턴 회의로 일본은 미국의 해군력에 일단 굴복하지만, 이후 절치부심하여 결국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도전한다. 결국 워드의 경고와 예언대로 되었다. 그렇다고 1922년 당시 임박한 전쟁 가능성은 없었다. 사업가였던 워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 확장으로 미국의 이익이 감소하자, 미국의 반일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

 

이런 기사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나 관련 사학자들이 전후 사정이나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기사를 수용하고 <연합신문>에 소개했다. 이는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3·1절이 되면 새로 발굴한 자료를 소개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그러나 충분한 고증을 거친 후에 보도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진 자료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현재 온라인에는 일본군이 중국에서 행한 만행을 마치 한국에서 한국인에게 자행한 것으로 바꾸어 소개하는 사진들이 떠돌아다닌다. 그런 역사 왜곡은 과거사를 바로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19년 제암리 학살 사건 재정리

한국인들의 시위가 갈수록 확산되자,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 1861~1922)는 지금까지의 진압 수단으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3월 11일 총독으로부터 군 동원을 허가받아 진압을 시작했다. 군인의 출동은 소위 '시범 케이스'를 보여 주는 진압인 마을 단위의 학살을 의미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수원군 향남면(현재의 화성시 향남면)에서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1,000여 명이 항일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일본 경찰의 과격 진압으로 사망자 몇 명이 발생했고 검거된 시위 지도자들은 고문을 당했다. 흥분한 주민들이 일본인의 주택, 학교, 정미소 등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4월 2일부터 군경 합동 토벌 작전이 시작되면서 다수 참가자가 체포되었다. 4월 13일 육군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 독립기념관에 있는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그림

 

4월 15일 경찰과 군인이 제암리에 와서 청년 23명(홍원식 권사, 안종후 권사, 안진순 속장, 강태성 등 감리교인 12명, 그리고 안종환, 안경순, 홍순진, 안종린, 안응순, 안상용, 안정옥, 안종형, 안종화, 안자순, 안호순 등 천도교인 11명)을 모아 제암리감리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른 후 총으로 사살했다. (숫자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교회에 접근하던 강태성의 아내와 홍원식의 아내가 칼에 맞아 죽었다.

 

이어 일본군은 이웃 마을에서 천도교인 6명을 더 살해했다. 가장 피해가 컸던 집안은 제암리 안 씨 15명, 고주리 김 씨 6명(김흥렬, 김기훈, 김기영, 김성렬, 김기세, 김세열) 등이었다.

 

제암리교회와 주변 15개 마을에서 4월 중순에 살해된 이들 중 천도교인 17명, 감리교인 12명 외에도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많은 집들이 불에 탔다. 천도교인이 더 많았던 것은 향남면 일대가 갑오년 동학 봉기 때부터 동학교도가 많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3·1 운동 당시 한 동네에 천도교인만 있으면 천도교인이, 기독교인만 있으면 교회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함께 있었으면 협력하여 만세 운동을 펼쳐나갔다. 제암리와 주변 마을에는 연합 운동이 일어난 곳이었고, 피해도 함께 당했다.

 

3월이 올 때마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며,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선열을 기억하게 된다. 당시 미국 정부나 주류 언론과 달리, 캔자스와 같은 지방의 도시 신문들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하고 일본을 비판했다. 동시에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도 그 사건을 조사하고 전 세계에 고발하는 일을 맡았다.

 

역사의 지평에서 일시적으로 악한이 이기는 듯하지만, 그들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권과 약한 자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선인들이 있다. 오늘은 그런 선열을 기억하는 날이다. 세월이 참으로 악하기 때문이다.

 ⓒ 옥성득, 2016.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