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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1970s

1971 거제도 공동체병원 프로젝트

WCC 기독교 의료사업단의 첫 연구 사업으로 한국에서 거제도 프로젝트 시행
내가 자란 거제도 하청면에 선교 병원이 있었다. 그 실전리 병원 언덕에서 보면 칠천도가 좁은 바다 건너 바로 앞에 있고 멀리 진해나 마산이 바라보였다. 지금은 그 언덕 아래 칠천도와 연결된 다리가 있다.

어릴 때 간혹 하청교회(장로회 통합측: 거제도는 호주장로회 지역이었으나 고신보다 통합측 교회가 많았다)에 백인 선교사가 와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거제도는 원래 호주장로회 선교회 지역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호주장로회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자료를 보니, WCC 기독교의료사업단의 연구사업이었고, 처음 파송된 선교사는 미국 연합장로회의  시블리(Jean Sibley) 의사였다. 이때부터 등장한 개념이 "Community Healing"이었다. 개인적 접근 대신 한 마을 전체의 위생과 건강을 증진시키는 "public health" 프로젝트였다. 간호보조사도 훈련하여 교회 청년 여성들이 고용되어 일했다. 지역 교회와도 긴밀히 협조했다. 병원 시설이 열악하던 70년대에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주변 마을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어서 장기려 의사가 고현(신현)에 진료원을 개설하고 수술까지 했다. 내 아버지는 장기려 박사의 수술로 생명을 구했다. 존 브라운 선교사의 호주산 돼지 수입을 통한 양돈 사업도 이때 시행되었다. 나는 그 돼지를 많이 키우며 자랐다. 

공동체 목회, 공동체 교육, 전인적 치유 등의 개념이 이때부터 신학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시블리 의사, 장기려 의사, 브라운 선교사의 세 가지 기독교 마을 '공공' 사업 영향권 아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는 그런 "마을 기독교"였다. 중세와 같이 교회가 중심이 된 마을, 그러나 세속 마을에서 교회가 어떻게 공적 신앙을 가질 것인가라는 고민이 70년대 한국에 강했다. 시골에서는 이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하청교회 장로님들은 모두 면장 등을 하신 분으로 유지였다. 그들은 마을을 잘 살게 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나는 교회가 마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랐다.

©옥성득의 한국기독교 역사


사족) 따라서 나는 호주장로회 신앙을 받은 할머니 집안의 신앙의 바탕 위에, 성결교회에서 유아 시절을 보냈고, 통합측 교회를 다니면서 WCC와 PCUSA의 '공동체 프로젝트' 혜택을 받았다. 고등학교-대학교는 고신측 교회를 다녔으며, 대학 SFC 주간 소식지<개혁신앙> 주필로 3년 간 발행했다. 신학교는 통합측 장신대를 다녔고, PCUSA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석사를 한 후,  박사과정은 감리회 계열인 보스턴대학 신대원에서 공부했고, 기독교와 한국 전통 종교의 만남을 주제로 논문을 쓸 때는 시골에서 미국 성공회 교회를 4년 간 다녔다. 지난 십 몇 년 간은 secular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한국 장로교회의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 있다고 하겠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 교단만 286개라 하고, 2019년에는 290개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몇 개 더 교단을 만들어 보아야 one of them이다. 새 교단 차린다고 해서 그곳에 진리가 거한다는 보장이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교회나 교단이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 신앙이 다른 게 아니다. 공동체 전체, 한국과 한국 교회 전체를 살려야 교단도 살고 개 교회도 산다. 교단 하나 새로 만드는 돈으로 시골에 병원을 세우거나, 먹거리를 제공하는 공동체 사업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