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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교인

한 애국자의 비극: 장인환

어느 한 애국자의 비극 A tragedy of a Patriotic Christian Korean American

장인환 (張仁煥, 1876년 3월 10일 ∼ 1930년 5월 22일義士

평북 선천 출신 장로교인, 1904년부터 2년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30세)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노동자로 살았고, 

미주 최초의 이민교회인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의 창립 멤버. '대동보국회'의 회원이었다.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종 양위를 주도한 스티븐스 외교 고문을 권총으로 처형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851 ~1908. 3. 25)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내린 날, 

의병장 이인용이 재외 한인에게 보낸 격문(The Holy War Menifesto)도 함께 도착했다그 내용은 

"동포들이여, 우리는 일치단결해서 조국에 우리를 바치고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그대들은 야만스러운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고해야 한다."는 호소에 이어 

"일본인들, 그 첩자들, 동조자들, 야만적인 일본 군인들을 모조리 처형하라"는 결론을 담았다. 

聖戰을 선언한 한국 의병대장의 전쟁 포고문이었다. 

이에 애국 지사들이 스티븐스를 살해했다.


3월 23일 전명운(田明雲, 1884년 6월 25일 ∼ 1947년 11월 19일)이 샌프란시스코의 여객선 선착장에서 일본인 총영사와 함께 있는 스티븐스를 공격했고, 격투가 벌어지자 같은 목적에서 별도로 대기하던 장인환이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저격, 이틀 후인 3월 25일 절명하게 하는 중상을 입혔다. 전명운은 장인환의 총격에 총상을 입고 장인환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공범 관계가 아님이 드러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당시 교민들은 성금을 모아 코플란(Nathan Coughlan)을 변호사로 선임했다. 이때 통역은 이승만에게 요청했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이라 살인범의 변호를 통역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남가주대학교 유학생이던 신흥우가 맡았다.


11월 첫 재판에서 변호사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애국적 정신병(patriotic insanity) 이론을 근거로, 

"이 사건은 일종의 정신 질환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범죄가 될 수 없다"고 변호했다.  

죄라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미친 죄 뿐, 애국적 망상이 죄였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도 좋았다.

12월 24일 배심원이 유죄 결정하고, 26일 25년 형을 언도 받았다.
나라가 없으니 크리스마스 때 판결을 받았다.

첫 재판에 대한 신문 기사와 1920년 석방 후의 모습을 아래에 싣는다.

그러나 나라엔 개 돼지보다 못한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으나 감옥 안과 밖이 차이가 없어

1930년 자살로 파란만장의 삶을 마감했다.

32세의 장년으로 총을 들어 적을 쏠 때의 심정과
54세의 노년에 3층 건물에서 몸을 던져 땅에 떨어질 때의 심정을 
하나님은 아시고 용서하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