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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로교인

문익환 목사: 공동번역과 통일의 꿈

북간도 출신 문익환(文益煥)은 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성서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으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교수의 충고로 성서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을 갔다. 그런데 이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거제도에 있던 아내와 가족의 생사를 걱정하며 한국에 오고자 했으나 올 길이 막혀있었다. 일본 맥아더사령부에 통역병으로 지원해서 도쿄에 거주하면서 아내를 부를 수 있었다.

1951 거제 옥포교회 앞

문익환과 휴전회담, 1951-53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문익환이 회담에 투입된 시점은 1951년 늦가을이었다. "도쿄에서 헬기를 타고 판문점에 이르면, 휴전회담은 언제나 3자 회담으로 진행되었다. 한편에는 미국 측 대표가 앉고, 맞은편에는 조선 측 대표와 중국 대표가 앉는데 공용어는 영어였다. 미국 대표가 말을 건네면 미국 측 통역자는 우리말로, 또 중국 측 통역자는 중국어로 통역을 하고, 반대쪽에서 조선 대표가 뭐라고 하면 영어와 중국어 통역자들이 동시 중개를 하는 회담이었다.

말과 글의 중요성
한국 측 대표는 발언권조차 없는 미국 측 '옵서버'에 불과했다.그렇게 판문점에서 영어, 조선말, 중국어, 일본어가 마구 뒤섞여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문익환은 한국어의 운명에 더 주목했는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미군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유엔극동사령부의 한국어학교에서 문익환은 교장이 되고 정경모는 교무주임이 되었다. 문성근이 태어난 때가 이때였다. 일본에 도착한 후 문익환은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았다. 생각해 낸 방법은 일본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전도사 생활을 했던 아내 박용길이 일본 한인교회 청빙을 받아 자녀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마침 아내의 형부가 외교관으로 도쿄에 거주하고 있어 그 집에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전쟁 통에 온 가족이 흩어져 피난살이를 하느라 죽을 고비를 넘던 때에도 막내 아들[문성근]만은 도쿄 한복판에서 비교적 윤택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정전 협정 후, 1954년 문익환은 다시 미국으로 학업을 마치러 가고, 가족들은 귀국하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공동번역
문익환은 한신대에서 구약을 강의하다가, 1970년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참여했다. 쉬운 말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성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유신 초기엔 조용히 번역에 매진했다. 그는 유진 나이다의 내용의 동등성 이론에 따라 의역을 했다. 그 한 예가 잠언 12장 9절이다. 개역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가 그의 손에서 "먹을 것 없는 양반보다는 일거리가 있는 상놈이 낫다."로 변했다. 민중어, 일상어라야 한국어다운 번역이라고 보았다.

공동번역 구약팀, 1975년 경. 이현주 선생은 국어에 능해 문장 교정 일을 했다.  사진 왼쪽에 손만 보이는 분이 선종완 신부

그러나 1975년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감옥에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성서-민중-민주가 만나면서 통일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 나갔다.

1986년 5월 이동수 분신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문익환 목사가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이 분신 투신했다. 그 사건으로 문익환은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내 눈 앞에서 한 학생이 도서관 옥상에서 온 몸에 기름을 붓더니 불을 붙이고는 분신하며 콘크리트 바닥 아래로 "쿵"하고 떨어졌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5월제 행사에서 문 목사님 연설을 듣던 중 내 눈 앞에서 분신해서 떨어지는 이동수를 보며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문 목사 옆에서는 김한식의 한사랑선교회 학생들이 "마귀 빨갱이 물러가라"며 통성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국사학과에 막 편입한 86년 봄 5월제에서 일어난 기독교인의 양극단--반미 주사파까지 수용하는 진보 대 안기부 지원까지 받는 보수 선교단체--을 보며 어느 쪽에도 동의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로 고민만 깊어졌다. 이미 나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매일 오후 숙대 이 교수님 연구실로 직행해 <한국기독교의료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 교수님은 미국 선교사들을 영적 제국주의자로 보는 민중사관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었다. 국사학과는 거의 운동권으로 채워져 있었다. 선교사는 제국주의 앞잡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한국교회사 중에서 선교사와 초기 한국교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완전 은혜로 학부 3학년 말에 결혼도 했다. 국사학과 졸업 때에는 갓난 아이를 안은 아내와 졸업사진을 찍었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문익환의 방북과 통일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 정권이 붕괴되자 문익환 목사는 통일운동을 개시했다. 88년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데모가 한창 일 때 다음 시를 발표했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중략)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잠꼬대가 아닌 잠꼬대")

그는 1989년 3월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했다. 정부는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감옥에 보냈다.

문익환이 방북하고 돌아올 때, 나는 신학생이었고, 둘째가 태어나기 직전이었고, 온누리교회(당시 교인 1000명 정도) 중등부(학생 100명 정도) 전도사였다. 국사학과를 거쳐 88년에 입학한 신학교도 그리 조용하지 않았다. 나는 문익환 목사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읽으며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수준이었다. 교회에서 문 목사의 방북을 놓고 한 장로님과 대화하다가 입을 닫았다. 여름엔 임수경 문규현 신부의 방북으로 더 시끄러웠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한글 성경 번역사를 공부하고 <대한성서공회사> 2권을 쓰던 1991년 문익환이 휴전선을 넘는 그림 "하나됨을 위하여"가 전시되었다. 그리고 그가 다녔던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1994년 6월이었다.

신학과 문학과 역사를 통합한 그는, 나와는 다른 시대, 다른 세계, 다른 상상력, 다른 실천력으로 산 어른이었다. 격동의 세월, 그 파도 위를 바람처럼 걸어가신 분이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는 한 시대를 만들어 나갔다. 통일은 그냥 오지 않는다. 씨를 뿌린 자가 있고, 물을 주는 자가 있고, 열매를 거두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는 울면서 씨를 뿌린 자였다. 30년 전 '정신 나간 머리'로 '잠꼬대'를 하던 자였다. 이제 우리 세대는 그 잠꼬대에서 싹이 나는 이 늦봄에 말짱한 머리로 물이라도 주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오는 6월 1일은 늦봄 문익환 탄신 100주년이다. (2018. 4. 25)

[추가] 나는 몇 년 전 해방 이후 한글 성경 번역사를 다룬 <대한성서공회사 III> 원고를 집필하면서 문익환 목사의 공동번역 관련 자료를 다시 읽었다. 공동번역은 유진 나이다의 "내용의 동등성" 이론을 적용한 역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