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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료, 간호

만주의 흑사병 유행, 1910-11

110년 전 겨울, 만주에 발생한 흑사병 Black death

 

14세기 흑사병으로 2,500만 명이 죽은 이후 가장 강력한 폐렴 흑사병이 1910-11년 만주에서 발생하고 기차 노선을 따라 급속하게 퍼지면서 수 만 명이 죽었다. 1911년 한 도시에서만 매일 180여 명이 죽는 경우도 있었다.

케임브리지 출신 의학자 오연덕(吳連德)은 페스트가 기침, 재채기, 대화할 때 공기 속에 흩어져 있는 병원체로 감염되는 폐 페스트이며, 그 매개체도 쥐나 쥐벼룩이 아니라, 산속 바위틈이나 평지에 굴을 파고 사는 마르모트라고 주장했다. 마르모트 가죽이 피혁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마르모트 사냥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페스트가 사냥꾼을 통해 전파되었다. 

1910년 10월에 발생해 11월에 하르빈으로 번진 후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만주에서 전염병은 늘 겨울에 발생했는데, 이는 추운 지방이라 겨울에 실내 생활만 하면서 비위생적인 좁은 공간에 모여 지냈기 때문이었다.  

간도 지역에는 한국인도 많이 살아 피해가 적지 않았다.  

만리장성을 넘느냐, 압록강을 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다행히 북경이나 서울로 확산되지 않았다. 압록강-두만강 경계를 철저히 방어한 결과 페스트가 한반도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큰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는 역사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늘 정치와 연결된다. 

결과

1. 이 흑사병으로 위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1910년만 해도 세균의 전염이라는 ‘germ theory'는 만주인들에게 인식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 정부는 환자의 기침을 통한 공기 전파와 면역이 약한 노약자들이 걸리는 것으로 소책자를 발행하고, 침술과 웅담과 어린아이의 소변을 먹고 면역력을 강화하면 예방 치료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마르모트를 금하고 감염자 시신을 장례 없이 바로 소각하면서 페스트가 잡혀나갔다.  

2. 일본의 위생 정치의 승리로 선전되면서 조선식민지 통치를 더 정당화시켰다. 한국인은 이 선전에 대항할 다른 담화를 만들 수 없었다.

3. 일본 정부와 경찰의 한국인 통제, 감시, 격리가 일반화되었고 수용되었다.

4.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한인들은 흑사병 공포에 시달렸다. 사실 1920-21년 만주 하얼빈에서 흑사병이 재발하여 3,125명이 사망했고 그해 만주에서 9,300명이 죽었다. 이와 함께 콜레라도 1919, 1926, 1932년에 크게 유행하여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