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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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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빌링스 목사의 집 [이 한 장의 사진] 1908년 내한한 빌링스(Bliss W. Billings, 1881-1969) 목사의 평양 사택, 1910년 경(?) 빌링스는 1917-32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영어와 종교학 강의 1932-39 감리회신학교 교장 1940 추방 1948 재내한하여 한국전쟁 때 구호사업하고, 1953년 은퇴.
거제 하청교회 초기 역사 100주년이 되는 나의 모 교회, 거제도 하청교회의 초기 역사, 1920-24; , 1924년 10월 8일자 내가 말로만 들었던 고향 교회의 초기 역사를 이렇게 원자료로 보게 된다. 설립자는 신영식(辛令植) 영수. 1920년 경 자택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1922년 4월에 하청리 중앙에 예배당을 세우고 가족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다. 1924년 하청리 유계리에 외부에서 온 신자인 강재풍 씨가 신학강습회를 열고, 교사 김재석 씨가 함께 하면서 신자가 늘 때, 권탁호(權卓鎬) 씨는 입교하는 날 유계리에 있는 초가 3간을 예배당으로 기부했다. 1926년 5월부터 유계리 예배당 시대가 열렸는데, 장년주일학교와 유년주일학교와 유치원까지 조직하게 되었다. 어릴 때 하청리 중앙에서 배를 타기 위해 부두로 걸어갈 때..
許時模(Haysmer) 의사 사건을 재론한다 1926년 6월 28일 조선일보의 한 기사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안식교 순안병원 의사 허시모(C. A. Haysmer 許時模)가 1925년 9월 15일(음력 7월 25일)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훔친 한 소년에게 사사로이 벌(私刑)로써 두 뺨에 '독약'(염산)으로 '도적'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소년 김명섭이 울면서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항의했으나, 의사는 오히려 도적질을 고치려면 그런 벌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썼다. 전국으로 반미 감정이 퍼지고, 도처에 규탄 대회까지 열렸다. 사회주의자들이 이 사건을 반기독교 운동에 이용했다. 일본과 미국 신문에도 보도되어 선교사를 비판하고 미국인의 인종주의를 규탄했다. 결국 상..
일제말 장로교회 전투기 헌납 1. 이것은 한 대가 아니고 두 대였다. 2. 감리교회도 헌납했다. 3. 불교, 천주교도 헌납했다. 4. 도시별로, 단체별로, 사업체별, 종친회별, 심지어 화류조합도 헌납했다. 1대 제작비는 1942년에는 10만원, 1945년에는 8만원이었다. (지금 전투기가 아님, 기관단총이 약 8천원 하던 시절.) 국방헌금 8-10만원을 하면 비행기 한 대 헌납이 가능했다. 1944년 5월 26일자 를 보면 황해도 부인회에 300대가 할당되어 헌금 모금을 하고 있다. 1945년에는 북경에 있는 한국인들이 모금하여 "愛國機 十臺 獻納"했다.(매일신보, 1945년 3월 24일자) 5. 한국에서 애국기(전투기)는 1932년부터 헌납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헌납하기 시작했는데, 1945년까지 육군과..
1932 송기주의 한글 타자기 1949년 안과의사인 공병우 씨가 3벌씩 가로쓰기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면서 한글 타자기 실용 시대가 열렸다. 그 전에 1913년 이원익이 개발한 최초의 타자기가 있었으나 실용화되지 못했다. 언더우드 2세도 발명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뉴욕에 유학하던 송기주가 타자기를 만들었으나 상품화되지 못했다. 송기주는 계속 한글 타자기를 연구하여 1933년 Underwood-Elliott-Fisher Co.와 합작으로 42개의 키로 구성된 타자기를 $65에 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가로로 찍고 세로로 읽는 타자기였다. 따라서 실용성이 떨어져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1933년 송기주 타자기에 대한 보도를 보자. 모양은 영어 타자기를 그대로 닮았으나, 이 송기주 타자기의 결정적 단점은 한글을 세로쓰기로 읽..
1945. 12. 6 윤치호 노환으로 별세 1945년 12월 6일 윤치호(1865-1945) 씨가 개성 자택 고려정에서 노환(뇌일혈)으로 병사했다. 81세. 여러 신문은 그의 사망 기사를 간단하게만 실었다. 다음은 12월 8일 기사와 장례식 광고이다. 다른 신문에도 동일한 광고가 실렸다. 장지는 충남 아산이었다. 어떤 학자는 그의 자살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 또한 위키백과에 사망일을 12월 9일로 적고 있으나 수정해야 한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인물 치고는 부고 기사가 초라하다. 윤치호는 1937년 만주사변(제2차 중일전쟁) 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참고로 윤치호는 1937년 9월 3일 남산 조선신궁에서 만주사변에서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원제의 대표자였다. 이때 4천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今月 三日에는 京城에서 京城..
1937 거제 지방 주일학교 강습회 지세포교회에서 열린 제5회 거제지방 주일학교 강습회, 1937년 3월 거제도는 호주장로회 통영 선교지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참고로 장승포읍에 진정률 장로는 수산업 회사 사장으로 거부였다. 그의 거액 희사로 1939-40년 선교부가 철수한 후에도 통영 진명여학교는 운영될 수 있었다. 해방 후 진정률 장로의 희사로 장로회신학대학과 연세대가 재단법인을 만들 수 있었다.
1919 상하이 대한민국 임정 "대한적십자회" 조직 1919년 7월 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이를 8월 29일 공표했다. 조직하기 전에 발표한 성명서 4장 중 첫 장이다. 이때는 적십자사로 했으나 조직할 때는 적십자회가 되었다. "한국 적십자사 모의문" 아름답다 자선의 사업이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요, 사람마다 요구하는 바나, 자선 중에도 천재와 인복을 불분하고 능히 사와 생의 변국을 불구하여, 아와 인의 격벽을 파괴하고, 제세의 실천을 양하여 박애의 활기를 수하여 좌면우고하여 무량한 생령을 기사회생하는 것은 자홉다. 오인의 면려하는 적십자사가 아닌가. ... 임원 명단이다. 초대 회장은 이희경이었다. 부회장 안정근, 이사장 서병호, 서기 김태연, 재무부장 고일청, 감사 옥성빈, 감사 김순애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