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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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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용어문제에서 한국인의 역할 1895-1904년 용어문제 논쟁 과정에서 문서를 남긴 이들은 대개 선교사이므로, 그들의 견해는 자세히 소개되어 있고 논의가 정리되어 있다. 선교사들이 성서위원회 번역자회 회원으로서 용어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차적으로 그들의 견해와 이해가 중요했다. 그러나 과연 한국인들은 침묵하고 수동적으로 선교사들의 결정을 수용했을까? 다음 책에서 나는 한국인들이 논쟁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원시 유일신에 바탕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신학화하는 작업에 참여했음을 논했다. 한국인 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갔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조사들이나 주시경과 같은 신흥 한글학자들로부터 하나님 개념을 배웠다. 선교사들의 결정만 기다리고 앉아 있을 한국인들이 아니었..
1937년 그리스도인 통계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37년 말 개신교인-- 224,688명(장로회 162,927명, 감리회 24,793명 , 구세군 14,594명,성공회 8,401명, 안식교회 8,105명, 동양선교회 5,868명 등이었고, 천주교인 149,719명, 정교회 185명. 합계 374,583명으로 개신교인 = 60%, 천주교인 = 40%. 전 인구를 22,000,000명으로 잡으면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구의 1.7%였다. 이게 일제시대 최대치라고 보면 된다. 장로교회와 천주교회의 경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김재준의 송창근 박사 회고, 1954 김재준, "새해에 생각나는 사람들: 송창근 박사," (1954년 3월): 182-185. "내가 죽거든 불에 태워서 그 유골을 네가 가지고 본국에 가서 한국신학대학 현관 밑에 파묻어 드나드는 학생들이 밟고 지나게 하라."-- 송찬근 목사의 유언, 1949년 웨스턴신학교 졸업식 연설 중 뇌일혈로 쓰러진 후.
1901-04년 전주 선교지부 건물 사진 잉골드 테이트 파일에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있고 그곳에 설명이 있어서 다음 사진의 건물을 다음과 같이 확정합니다. CHUNJU STATION, 1901 1 Mr. Tate and Miss Martha Tate's House 2 Dr. Ingold's House 3 Hospital 4 Dispensary 5 Gate House 1 최의덕 목사와 여동생 최마태의 사택 2 잉골드 의사 사택 3 예수병원 4 진료소 5 문지기의 집 잉골드 의사의 집을 짓기 전이라 초가에 살고 있다. 언덕 위에 레이놀즈 목사, 해리슨 목사 등의 사택이 있다. 다음은 The Missionary (August 1904): inner cover 사진이다. 산 위에서 바라본 광경으로, 중앙에 테이트 목사 사택과 오른쪽 병원과 진료소..
김익두 설교집, <信仰의 路>, 1924 (경성, 박문서관, 대정 13년 1924년 6월 25일), 88쪽. (16편의 설교) 편집 발행인 노익형, 교정 김익두 목사, 인쇄 심우택 (대동인쇄주식회사), 발행소 박문서관, 판매 신구서림. 언더우드의 (1920)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개인 설교집이다. 김익두 목사가 남대문외교회에 부임하여 한 설교 가운데 16편을 노익형이 정리했다. 다음은 첫 설교문인 "항상 즐거워하라" 본문 첫 페이지이다. 아래 설교문 전문을 싣는다. 김익두 목사는 유식한 일본어체인 '...적'(과학적, 근대적 등)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일상어로 대화체로 설교하여 회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부흥사로서 청중 중심의 이야기체 설교를 하고 때로는 상스러운 말도 하는 목사로 유명했는데, 이 설교에서도 대화체나 '외입..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학교 설립일은 1906년 10월 1일 (2008)에 이어 올해 연세대 박물관의 에비슨 전시회에서 1906년 9월 29일을 설립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10월 1일이다. 양성학교(양성소)를 기획, 조직한 것은 9월 29일, 학생을 받아 개교한 것는 10월 1일이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바로잡아야 한다.
홀 의사의 Christmas Seal과 엽서, 1932-40 한국의 어린이와 어머니를 위해 아기 예수 오셨네! 1. 크리스마스 씨일, 1932-1940년 해주구세(결핵)요양원 원장 홀(Sherwood Hall)이 1932부터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1940년까지 해주구세요양원 결핵 환자 치료를 위해 모금하기 위해 고안하고 발행한 크리스마스 씰(Christmas seal)이다. 영국에서 1904년에 시작된 성탄절 씰 운동은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에서 홀 의사는 한국인의 문화와 고유미, 전통 풍습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한국화로 실을 만들어 일제 말 암울한 시기에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의료 선교에 도움을 주었다. 2. 크리스마스 엽서, 1933-1937년 80년전 조선결핵박멸운동회. 해주결핵요양원 홀 의사가 만든 크리스마스 실 엽서 4종, 1933..
한국의 첫 공식 간호원 히스코트, 웹스터, 로이스 내한, 1891-92년 개화기 최고의 간호 수준을 자랑한 서울의 영국성공회 병원 1895년부터 내외 풍습을 깨고 남자환자 간호를 시작한 웹스터와 로이스, 6~7년간 봉사 후 죽어 양화진에 묻히다 서울 성마태병원 수술실의 로이스와 웹스터 간호원, 1898년 한국 초기 간호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두 가지는, 첫 공식 간호원들은 영국 성공회가 파송한 세 간호원이었으며, 1906년까지 서울에서 최고 수준의 간호는 영국 성공회의 서울 낙동(현재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앞) 성마태병원(남자병원)과 정동의 성베드로병원(여자병원)에서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1890년에 시작된 영국성공회 한국선교회는 거의 평생 서원한 독신자로 이루어졌는데, 대다수 여자 선교사는 초대 주교 코르프의 요청으로 성베드로수녀회가 파송했다. 성베드로수녀회는 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