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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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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교의 모델: 삼각형인가 오각형인가? 흔히 근대 선교는 전도(교회) - 의료(병원) - 교육 (학교)의 삼각형을 모델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자료를 일부만 읽었을 때 내리는 결론이다. 사실은 전도(교회)를 위해서 의료(병원) + 교육(학교) + 문서(활판소) + 여성 사업이 함께 가는 오각형이었다. 한국 개신교는 의료, 교육, 언론과 서적, 여성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신사상과 신기술을 소개하면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 오늘 선교도 여전히 medical mission, educational mission, literary mission, woman mission 등을 통해 소외되고 차별받는 자들을 도울 때 교회가 설 것이다. 문서 선교에는 전도 소책자와 서적은 물론 신문 잡지와 같은 언론 활동을 포함하며, 여성 사업(Woman'..
한센씨병(나병) 선교의 현재적 의미 [leprosy mission 나병선교] 일제 시대 개신교는 부산, 대구, 광주-순천에서 나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하고 간호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약 2만 명의 한센씨병환자들이 존재했다. 일제의 소록도 수용소가 1916년에 정식 개원하기 전부터 개신교 의료 선교는 몸 + 영혼의 전인 구원의 모델로 나병 선교를 전개했다. 1916년은 또 chaulmoogra oil(대풍자유)이 나병 약으로 개발되어 치료에 큰 효과를 보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한국학계에는 소록도 수용소를 미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관점에서 연구한 책과 논문들이 많다. 현대 사회가 온라인 정보를 통해 '감시와 통제'하는 사회가 되었기에 푸코의 개념은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1910-60년대 한국개신교의 나병 선교는 오늘날 신학의 한 ..
1896 한국 기독교 통계 Daniel L. Gifford, Everyday Life in Korea (New York: Revell, 18908), Appendix A. 개신교 선교사 101명, 천주교 선교사 34명 청일전쟁 후 1년 동안 개신교에는 217명이 새로 입교했고, 천주교에는 1,250명이 입교했다. 이 추세는 점점 그 간격이 좁혀지다가, 1902년 전후에 역전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위 표에서 보듯이 의료에 개신교가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 병원은 9개, 진료소 12개에서 455명이 입원 치료를 받았고, 3만 여 명이 외래환자로 치료를 받았다. 교육 선교에서는, 1905년 이후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개신교 학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내 석(박)사 논문의 역사 [30년 전 석사논문] "초기 성경번역에 나타난 주요 논쟁 연구 1877-1939" (장신대 대학원, 1993년 2월) 내가 쓴 1993년 신학석사 졸업논문 안에는 신문 기사 세 개가 들어 있다. 1991년 말 온누리교회 전임전도사를 사임하고, 1992년 1년간 시골 거창에서 쓴 논문으로 1993년 전국신학대학협의회가 주는 논문상을 받았고 (3명 수상자 기독교윤리학의 김정준, 실천신학의 장성배, 역사신학 옥성득, 모두 나중에 교수가 되었다.) 내 논문이 신문 세 곳에 소개되었다.에는 세 논문 모두, 와 에는 내 논문만 소개되었다. 기독공보와 한겨레가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출판된 의 신명과 문체 등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신문 모두 한국교회 보수화를 비판하는 내 논문을 잘 소개해 주었다..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 1974 혜촌 김학수 화백의 성탄절 그림, 1974 에 실려 흑백인 점이 아쉽지만 ... 잘 알려진 후기의 다른 그림들보다 단순 소박해서 좋다. 제목이 없는데, "한양에 들어오는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붙여본다. 눈길에 경배하러 가는 모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난 후, 갈 때에는 로 가는 게 인생이다.
성탄절 전도용 발췌 성서, 1954년 성탄절 전도용 발췌성서 표지, 대한성서공회 발행, 1954년 전후에 읽을 거리도 제대로 없을 때 성경은 많은 학생들에게 독서를 위한 거의 유일한 책이었다.
한국인의 첫 성탄절 예배, 1887년 1887년 9월 27일 목요일 저녁 정동장로교회(새문안교회)가 조직되고, 10월 9일 일요일 벧엘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1887년 12월 25일에 두 교회는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한국 개신교회의 첫 성탄절 모습을 아펜젤러 일기를 통해서 보자. 내가 학부 3학년 때인 1984년, 중앙일보 사옥 마이크로필름실에서 출력한 후 아르바이트하던 원효로 한통개발회사 기사실에서 번역했다. 아펜젤러 내한 100주년 때인 1985년에 연세대출판부에서 발간한 , 314-316에 나온다. 당시 내가 공부한 흔적도 남아 있다. 최초의 산타클로스는 아펜젤러! 그는 양말 네 개를 걸어놓고 딸 엘리스, 피터 쿠퍼, 이서식, 최갑길 네 아이에게 동등하게 선물을 주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성탄 선물을 교환..
2018년 한국 개신교 분석 1. 감리교회 교세 100만 명으로 추락 얼마 전 (2018년 5월) 감리교회 교세가 발표되어 약간의 충격을 주었다. 다음은 대한기독교감리회 웹페이지에 공식 발표된 자료이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068 한 때 150만까지 갔으나 이제 100만 명이다. 올해(2018년) 말 예상치는 내가 추가했다. 곧 20년 전인 1998년으로 돌아간 130만 명 수준이다. 그러나 실제 출석하는 교인 숫자는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지난 20년 간 감리교회가 보여준 내부 분열과 부패상을 생각하면, 2000년대 10년 간 증가한 것이 이상할 정도이며, 2011년부터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정상적인 통계가 나왔다고 볼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