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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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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뿌리: 김백문 초원 김백문(初園 金百文, 1917-1990) 은 김해 김씨 가정에서 아버지 김광조 옹과 어머니 문아지 여사 사이에서 4남 2녀중 차남으로 1917년 10월 19일 경북 칠곡군 안동면 안의동 448번지에서 출생했다. 김백문이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직접 쓴 세 권의 책을 보면, 상당한 한문 교육을 받은 것으로 짐작되며, 일제시대 공립학교도 어느 정도 다녔다고 생각된다. 그는 만17세 무렵 형을 만나러 원산 신학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남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김백문을 수도의 길로 들어서게 이끈다. 그리고 김남도의 소개로 원산 신학산의 창설자인 백남주 목사의 애제자가 되었다. 김백문은 원산 신학산과 장좌동 성주교 생활을 통해 점점 신비주의에 몰입하였고, 1937년 즈..
1942 대동아전쟁 위해 교회 종 헌납 한 번 무너진 교회, 무엇을 못하랴? 1942년부터 교회 종을 적국인 영미 격멸의 탄환 만드는데 써 달라고 헌납. 한 교회가 나서면 충성 경쟁은 이어진다.
1943. 12. 29 성결교회 해산 1943년 12월 29일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는 해산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미 기독교 색채를 제거하고 일본적인 기독교로 재출발하려고 했으나,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가 근본적으로 일본 천황제 국체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해산한다고 발표했다. 즉 성결교의 사중복음 중 재림 교리가 일본 국체와 상반되고, 유일신론이 천황숭배와 배치되기 때문에, 전시하에서 황민으로 충성하기 위해서 교단을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1936년 교권파가 교단의 실권을 잡고 개혁파를 제거한 결과였다. 1938년 신사참배의 죄가 가볍지 않았지만, 1939년 기독교 교단 중 가장 앞장 서서 정신총동원성결연맹을 조직하고 제2차중일전쟁을 지지하고 나아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지원하다가, 마침내 기독교의 근본 교리까지 부정하는 중죄를 지었..
1939 한국 천주교의 신사참배와 전쟁 지지 1932년 마침내 일본 천주교회는 동경 대주교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애국심과 충성을 드러내는 시민적 예식인지에 관해 아니면 신도의 종교의례인지 문부대신에게 정식 회답을 요구하게 하였다. 문부대신은 차관을 통해 신사참배는 시민적 예식 외에 별다른 것이 아님을 통고하였고, 일본 주교들은 이에 근거하여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허락하였다. 일본 주교들의 결정을 근거로 로마 교황청은 1936년 5월 18일 천주교 신자들은 신사 참배를 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고, 그 사실을 주일(駐日)로마 교황 대사관에 통고하였다. 이에 교황사절 마렐라(Marella)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한 감상(感想)"이라는 서한을 통해 교황청의 통고를 전달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거의 모든 성직자..
기독교 입문 추천도서 50권 대학생 청년 기독교 입문 추천서: 여러 분들이 추천해 준 책이다. 무순 기독교 입문 1 김영봉, (복있는사람, 2019) 2 존 스토트, (생명의말씀사, 2009) 3 로완 윌리엄스, (복있는사람, 2015) 4 Tim Keller, The Reason for God (두란노, 2017) 5 -----------, The Prodigal God (두란노, 2016) 6 C. S. Lewis, (홍성사, 2018) 7 Greg Gilbert, What is the Gospel? (부흥과개혁사, 2010) 8 D. A. Carson, The God who is There (두란노, 2010) 9 마커스 보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10 김형석, (두란노, 2018) 11 필립 얀시, (IVP, 20..
예수교 있는 고을에서는 군수하기 어려워 원문을 인용할 때는 정확히 해야초기 한국 개신교의 반봉건적 개혁성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인용문은 1899년 3월 1일자 에 실린 다음 "내보" 소식이다.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에 유명한 글이다. 먼저 원문을 보자.그런데 한국기독교사연구회, (기독교문사, 1989 초판), p. 261은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붉은 칸 부분을 원문에서 확인하면"유세력한 양반"-->"엇던 유세력한 량반"으로;  "하느님을" --> "하ᄂᆞ님을"으로 "그 까닭인듯" -->  "이 ᄭᆞ닭인듯"으로 바르게 고쳐야 한다.  더욱이 이 책의 인용문은 현대 철자법으로 고친 것도 아니고,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도 아니고, 필자가 자의적인 철자법으로 옮겨 놓았다.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다음과 같이 현대어로 옮겨도 좋을 것이다..
"문명 개량 진보"의 120년 1907년 8월 13일 도쿄에 있던 전 내무대신 유길준은 이토 통치 하의 대한제국이 새 내각(총리 김윤식)을 구성하고, 자신을 내무대신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준비했다. 떠나기 전 그는 전 일본 내무대신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를 만나 정책 조언을 구했다. "자유민권운동가" 이타가끼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전에 먼저 인민을 문명화하여 부강에 이르는 것이 상책이듯이. 조선도 일본의 동양 평화론[일본을 리더로 삼아, 곧 한시적으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 백인의 제국주의를 막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루자는 동아주의]에 동참하여, 인민을 먼저 문명화시키는 개량 진보책을 채택하라고 충고했다. 지난 120년 간 일본이 한국에 대해 취한 정책과 공작이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독..
신학과 교회의 근원은 학문 도학과 교화의 근원은 격치요, 교회의 근원은 격치학이니라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898. 1. 19)= 신학과 제자화의 근원은 학문이요 교회의 근원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다.초기 한국 교회는 대학의 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의 원리와 프로그램을 인정하면서 격물치지의 학문을 강조했다. 유교와 달리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성의정심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할 수 있으므로 기독교가 더 우월하다고 논증했다. 곧 인륜과 물륜에서는 유교와 유사하나, 천륜에서 초월적 차원을 가지므로 한국의 문명 교화에 더 나은 종교하고 주장했다.그러나 일제 식민지 시대나 독재 시절에 국가주의의 우민 교육 정책에 눌려, 교회는 학문과 신학을 버리고, 교회 부흥과 성장에만 치중했다. 그 결과 사회의 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