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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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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여자청년회 빙수점 三山人, “諷剌諧謔, 新流行豫想記: 女子靑年會 氷水店,” 제11호 (1928년 2월); 99-100. 금년에 무엇이 새로 유행할 듯 십으냐? 나 가튼 둔한 인물에게 그런 것을 뭇는 것은 아모리 해도 실책이다. 그러나 실책은 그의 실책이지 내 잘못이 안이니 인심 좃케 생색이나 내고 딴청이라도 하나 해 본다. 독자께는 미안하지만. 4월이 되면 야시장이 버러지고 물건 살 사람, 안 살 사람이 쏘다저 나온다. 그런대 夜市에 나오는 사람이 반듯이 물건 살 필요로만 나오는 것이 안이니 야시에서 물건을 좀 더 잘 팔 욕심이 잇는 사람은 무얼로던지 다른 데에 업는 야시의 명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이때까지로 보아서 야시의 명물은 「싸구료」 소리와 뿌럭지 업는 花草장사 뿐이라 할 것이다. 만일 더 잇다면 수박장사와 깡깡..
과거엔 굳이 베니스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한강은 다스리기 쉽지 않았다. 서울은 거의 매년 홍수에 시달렸다. 1925년 7월 18일. 이 날은 을축년 대홍수의 날이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송파근린공원 입구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이런 일이 있기 전에도 서울의 곳곳은 여름 장마철에 침수되기 일수라, 베니스의 도시가 되었다. 다음은 1922년 종로 2가 YMCA 건물을 받아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중앙감리교회 사진이다. 아예 침수를 예상하고 예배실을 올려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홍수는 계속되었다. 이후 이런 일은 다시 없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으로 강 치수와 하수도 정비는 언제나 중요한 일이다.
한국 전쟁과 기독교 어떤 책이 있나? 최근 발행순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서 선별했다. 2015, 윤정란, , 한울엠플러스. 2000년에 숭실대 박사, 여성사, 독립운동사, 개신교사 전공 학자. 탈식민주의 입장. 한국교회의 주류화 과정 추적. 2015, 김창식, , 쿰란. 반공 포로(인민군) 출신 목사, 숭실대 졸, 서울신대 졸, 미국에서 목회, 교수, 체험과 비화를 중심으로 서술.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시각. 2009,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러시아연방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 러시아 측 1차 사료가 번역 정리되어 있다. 1945년 이후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군의 작전 명령들이 북한교회 이해에 도움이 된다. 1999, 김흥수,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교회사 전공 저자의 서울대 종교학과 박사논문을 책으로 출판했다...
이상재, 연설 "조선 청년에게" (1927) 李商在, “演說: 朝鮮靑年에게” (上) 원반: 제비 表朝鮮 레코드(Nitto) B143-A, 1927년 녹음 *국립국악원 제작, 한국고음반연구회 기획 이 음반은 1927년 일본 일동(닛토) 축음기회사의 한국 레이블이었던 제비표 조선레코드에서 당시 YMCA 총재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의 육성 음반을 취입한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RXX7frivlQ&list=PLurmbV5BLY2Kiud5XqTKTlbjfjPi7YnAe&index=7 --------- 내가 조선 청년에 대하여서 세 가지로 관념을 보는데, 첫째는 조선 청년에게 아주 극단으로 희망을 허는 게 있고, 둘째로는 조선 청년에게 시방 현상을 보고서 극단으로 비관하는 일이 있고, 필경 셋째로..
War and Worship, 1951 전쟁 중에도 폐허 속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곳에서는 예배가 중단되지 않았다. 예배당이 서 있던 자리에 가마니를 깔고 혹은 흙 바닥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했다. Resilence. 복원력. 오래 참고 견디는 한국 교회의 회복력은 일제 시대와 한국 전쟁을 겪으며 그 피 속에 내면화 되었다. 다가오는 고난과 절망의 시기를 지나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 화려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때문이 아니라 저 흙 바닥에서 드린 예배 때문에 아직도 교회가 살아 있다. 로마서 8:37 (비록 남북은 분단되었으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분단할 수 있겠습니까?
1956 영락교회 면려회, 공민학교, 성경구락부, Mrs. Genso 이 한 장의 사진 1956년 영락교회 기독청년면려회, 영락고등공민학교, 대한소년성경구락부 서울지부 본부 앞에서 겐소(Mabel Genso) 부인과 김성무 성경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1969 마삼락 박사 대담 한국인에게 바란다: 잃어버린 생활철학 회복하고 더높은 이상을 추구하라. 대학생들은 더 열심히 공부해야.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문화와 민족성 때문에 한국 생존. 문제는 기독교의 분열성. 인구의 8%인 기독교에 잠재 가능성 많음. 50년 후 한국 개신교인은 다시 50년 전 수준으로 가고 있다. 1969년 인구의 8%가 개신교인이었다. 이제 다시 한 자리인 9% 수준. 곧 실제 주일 출석교인은 480만 정도(장로교인 280만, 오순절 70만, 감리교인 60만 등)이다. 그 모든 책임은 현직 신학교수들과 300명 교인 이상 중형 이상 교회의 목회자와 장로들에게 있다.자기 교단, 자기 교회 잘 나간다고 폼잡지 말라. 한국교회 전체를 살릴 궁리를 해라. 50년 전 마삼락Samuel Hugh Moffett 박사의 이..
1949년 반민자 재판 지지부진 이 한 장의 사진: 1949년 4월 4일자 https://www.facebook.com/designersparty/photos/a.756143587762860/1244138862296661/?type=3&theater 70년 전 반민자 재판 해방 후 3년 간 미 군정은 반민족 친일파에 대해 "너희 일은 너희가 처리하라"는 말로 처벌을 미루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곧 특별법이 마련되어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1949년 1월부터 재판에 들어갔으나, 보도처럼 정의 실현은 지연되고 있었다. 평가 1912년 일제 식민지 하 첫 대 공판인 105인 사건 때는 선교사들이 적극 노력하여 법정 정의를 이루어내고 105인 중 99인의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해방과 정부 수립 이후 민족 정기를 수립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