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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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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을밀대의 벚꽃, 1910년대 Peony Point in Cherry Blossom Time - Pyongyang, Korea, 1910s 1910년 경에 심은 나무가 10년 가까이 자라면서 모란봉을 벚꽃으로 덮었다.
1972년 석굴암 불상 도안 1만원 권 지폐 사건
1980 한철하, 파타야 로잔 세계복음화대회 소개 1980년 7월 12일 태국 파타야 대회 참가 후 66년 베를린 이후 세계 복음화운동 정리하면서, 한철하 박사, 여전히 로잔대회 내용 소개치 않아. 광주사태 직후 때문인가 태생적 한계인가? 그러나 1974년에 이미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발행한 신학과 선교에 로잔언약 내용이 실렸다. 조종남, "세계복음화국제대회와 로잔 언약," (서울신학대학교) : 제2집(1974년 9월.) 그런데 한철하는 이 글에서 로잔 언약 간단히 언급하고 세계복음화운동을 강조하고 있다. 1980년 7월 파타냐 세계복음화 대회는 5월의 멜본 CWME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복음주의 권이 인류 사회의 부정의와 위기 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하지만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이 부분도 침묵했다. .
1972 문동환, 문상희 장신대 강의 "한국 대중과 복음 선교" 1972년 장신대 대학원 세미나 특강 시리즈: 30대 소장들 등장하여 한국교회 사회계급구조 분석 후 하층계급 침투 선교시급하다... 사회적 구원 없이 개인구원 불가하다 주장. 7. 문동환 교수 강의, "교인의 사회 계층에 대한 고찰," , 1972년. 8.문상희 교수 강의, "사회계층적 입장에서 본 한국기독교," 1972년. 벌써 이때 중산층교회 체질 개선, 구조혁신, 양극화로 신흥종교(이단) 범람 이야기.
1975 박형규 목사 1938-45년 북한에서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해방 이후 남한에서 살지 못했을 것이다. 1960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1960년대에 교회는 죽었을 것이다. 1972-79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80년대에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0-87년에 교회가 침묵했다면 기독교는 1990년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교회가 교회 내부의 부패와 불법에 대해서마저 침묵한다면 2020년대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1970년대 교회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인물, 여기 박형규 목사의 대담 기사가 있다.
한국전쟁 후 고아 미국에 입양 3,800명 1954-60년 6년 간 미국에 입양된 수와 입양 기관별 통계 1954-56년: 397명 1955-60년: 3,406명---홀트입양프로그램 53.5%, Child Placement Service 29.7%
1952 서귀포장로교회 [이 한 장의 사진] 제주 서귀포장로교회 한기춘 목사 위임식, 1952
1951. 2 "Special Report of Korea," Presbyterian Life 한국전쟁 상황 포항교회 캠벨 선교사의 전도트럭 "예수께서 구원한다" 경북에서만 40개 장로교회 완전 파괴 Rev. Harry Hill, Rev. Edward Adams, James Philips, Raymond Provost Rev. Harold Voelkel, Rev. Francis Kinsler 언더우드 가족, 파괴된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 홀 피난민의 생활, 피난민을 돕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 영락고아원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 어린이들의 교육 문제 인천상륙 작전 중 Rev. William Shaw의 아들 Bill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