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스크랜턴

감리회 첫 선교사는 아펜젤러인가 스크랜턴인가?

'첫 선교사는 알렌인가 매클레이인가'(새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2회)와 연관되는 주제가, 감리회 첫 선교사는 매클레이, 아펜젤러, 스크랜턴 중 누구인가라는 문제이다. 2회에서 매클레이는 감리회의 첫 '방문 선교사'임을 밝혔다. 오늘 주제는 방문 선교사가 아니라 감리회의 정식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고 임지인 서울에 거주하고 정착한 첫 선교사는 누구인가이다. 

▲  선교 50주년 때 노블 목사가 기억한 스크랜턴과 아펜젤러(1934). "환자를 가진 의사 스크랜턴과 학생을 가진 교사 아펜젤러"라고 쓰여 있다. 스크랜턴이 앞에 나와 있다. [출처: Within the Gate (Seoul: YMCA Press, 1934), 19.]

1. 감리회의 첫 주재 선교사는 스크랜턴이다

 2015년 3월 20일 자 <당당뉴스>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가 3월 17일 개최한 '한국 감리교회 개척 선교사의 영향과 교훈' 심포지엄을 보도하면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누구인가"라며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로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를 꼽는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3시, 함께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두 선교사 중, 누가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대한 것은 '제물포에 발을 먼저 디딘 이가 누구였느냐'와 '누가 먼저 선교 활동을 시작했느냐'에 따라서 갈린다. 전자의 경우 아펜젤러이고 후자의 경우 언더우드다. 언더우드는 제물포 도착 이후 곧장 서울로 들어가 알렌의 제중원에서 일을 한 반면, 아펜젤러는 일본에 돌아갔다가 7월 29일이 돼서야 서울에 입성,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감리교 최초 선교사와 관련, 1885년 5월 3일 아내와 어머니를 일본에 남겨 두고 홀로 한국에 들어와 알렌의 제중원에서 의료 사역을 시작했던 감리교 목사이자 의료선교사였던 윌리엄 벤톤 스크랜턴을 주목해야 한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들보다 한 해 앞선 1884년 6월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 매클레이를 '공식적인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 <당당뉴스> 3월 17일 자 기사 '같이 시작했는데 장로교 교세가 감리교보다 큰 이유는?'

첫 번째 질문은 1984년 이전에는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으나, 기독교 선교 100주년 때 장로회와 감리회 간의 유치한 경쟁 의식 때문에 나온 것으로, 제물포에 발을 먼저 디딘 것까지 따졌다. 감리회 측은 아펜젤러가 먼저 상륙했으니 첫 선교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제물포 땅에 첫 발을 밟은 자는 아펜젤러도 언더우드도 아니었다. 레이디 퍼스트, 바로 아펜젤러 부인이었다. 아펜젤러는 임신한 아내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삼판에서 내려 부두에 안전하게 오르도록 도왔다. 그러므로 굳이 땅에 디딘 첫 발이 중요하다면 아펜젤러 부인이 첫 선교사가 된다. 그러나 누가 제물포에 처음 상륙했는가와 누가 첫 선교사인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만일 첫 상륙 순서가 중요하다면 그 전에 이들이 부산에 상륙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제물포보다 부산에서 누가 먼저 부두에 내렸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이나 제물포는 경유지이므로 부차적인 장소이며, 임명지인 서울에 도착해서 정착했는지의 여부로 첫 주재 선교사를 정해야 한다.

한국을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는 1832년 귀츨라프(독립), 1865~66년 토마스(스코틀랜드성서공회), 1884년 여름 매클레이(미북감) 순이다. 이들은 한국에 임명된 것이 아니므로 주재 선교사라고 할 수 없다. 한국(서울)에 거주하는 정식 선교사로 임명된 순서는 미국북장로회의 경우 헤론(1884년 4월 28일) - 알렌(7월 22일 자 전보) - 언더우드(1884년 7월 28일)이며, 북감리회의 경우는 스크랜턴(1884년 10월 4일) - 아펜젤러(1885년 1월) 순이다.

이들이 서울에 도착한 순서는 알렌(1884년 9월 22일 월요일), 언더우드(1885년 4월 5일 일요일), 스크랜턴(1885년 5월 6일 화요일), 헤론(6월 21일 일요일), 아펜젤러(1885년 7월 29일 수요일) 순이다. 곧 헤론만 임명은 먼저 받았으나 의사 수련을 더 받는 바람에 1년 뒤늦게 왔고, 나머지 네 사람(알렌, 언더우드, 스크랜턴, 아펜젤러)은 임명 순서대로 서울에 도착했으며, 그 순서대로 한국의 첫 개척 선교사들이 되었다.

아펜젤러 부부는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 오후 제물포에 상륙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정세 불안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서울에 들어가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미국공사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6월 20일 다시 제물포에 왔으나 더 기다려야 했고 마침내 7월 말 서울에 들어왔다.

그 전에 5월 6일 스크랜턴이 홀로 입경했으며, 그 가족과 어머니도 6월 제물포에 도착한 후 바로 서울로 왔다. 스크랜턴이 주택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펜젤러 부부는 스크랜턴이 서울에 그들의 주택을 매입할 때까지 제물포에 한 달 이상 더 머물러 있어야 했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6월 21일 헤론이 서울에 도착하자, 정동 주택에서 독자적인 의료 사업, 곧 감리회 선교를 시작했다. 아펜젤러가 오기 전의 일이었다.

따라서 임명지 도착 순서와 임명지에서 거주와 선교 사업 개척을 기준으로 할 때 알렌이 첫 선교사이며, 내한한 첫 목회 선교사는 언더우드가 된다. 감리회의 경우 스크랜턴이 첫 내한 선교사가 되며, 둘째와 셋째는 스크랜턴 대부인과 부인이며, 넷째와 다섯째가 아펜젤러 부부가 된다.

부산이나 제물포에 도착한 시점이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항구가 경유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이들은 모두 서울에 임명되었으므로 서울 입경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부산과 제물포(인천)에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1885~87년 두 항구에는 임명된 북감리회 선교사가 없었고, 한국인 감리교인도 없었고, 따라서 한국 감리교회도 없었다. 선교사가 잠시 머물면서 예배를 드린 것이 개교회 출발이 될 수는 없다. 한국어로 설교하고 개종자가 나오고 정해진 예배 처소(가정집이나 별도의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고 세례와 성찬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한 개교회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감리교회 첫 선교사는 스크랜턴으로 해야 한다. 그는 아펜젤러보다 3개월 전인 1884년 10월 뉴욕 본부에서 한국 선교사로 임명도 먼저 받았고, 12월 4일 목사로 안수도 먼저 받았으며, 1885년 5월 임지인 서울에도 아펜젤러보다 약 3개월 먼저 들어왔다. 아펜젤러는 1885년 초 한국에 임명받았고 안수도 그때 받았다. 두 사람은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를 함께 떠났다. 비록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먼저 내렸으나, 정세 불안으로 호텔에 여장만 풀었다가 일본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선교를 시작할 때는 이런저런 일이 생긴다. 아펜젤러가 스크랜턴보다 서울에 늦게 들어갔다고 해서 뭐가 큰 문제인가? 당시에는 누가 첫 선교사인가를 논하지 않았다. 의료는 스크랜턴, 교육은 아펜젤러가 맡아서 함께 일했다. 감리회는 아펜젤러-스크랜턴이 함께, 장로회는 앨런-언더우드-헤론이 함께 한국의 두 선교회를 개척한 공로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2. 왜 아펜젤러만 첫 선교사로 기억되었을까?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는 역작 <스크랜턴>(2014) 서문에서 스크랜턴을 '잊혀진 선교사'로 규정하고 왜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고 썼다. 그의 행적을 찾아가면서 만난 스크랜턴은 먼저 '외로운 선교사'였다. 그의 무덤은 일본 고베의 외국인 묘지에 찾는 이 없이 버려져 있었다. 이어서 그는 '효자 선교사'로 '선한 사마리아 선교사'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책 결론에서 스크랜턴이 지향한 선교 가치 8개를 밝히고 851쪽 마지막 문단에서 그의 이름 이니셜을 이용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이것이 오늘 한국 감리교회가 실천할 선교 가치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Samaritan(사마리아인) - Curing(치유) - Redemtion(구원) - Agape(사랑) - Neutral(중립) - Travelling(순회) - Oecumenical(에큐메니칼) - Native(토착화)로 이어지는 'SCRANTON(스크랜턴)' 선교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본론에서 암시는 하였지만 결론에서 왜 그동안 잊혀진 선교사로 남았는지 명확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곧 아펜젤러와 비교 관점에서 정리하지 않았다. 또한 몇 차례 스크랜턴 학술 대회를 하면서도, 스크랜턴을 감리회의 첫 선교사로 주장하지도 않았다.

친일파 감독 해리스의 영향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아펜젤러를 첫 선교사로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변경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여전히 감리회 역사학계와 교계가 1922년과 1934년, 1984년 때처럼 '아펜젤러 세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거나, 스크랜턴을 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1905년 상동감리교회 청년회의 항일운동을 지지하거나 묵과한 스크랜턴은 청년회를 해산하라고 지시한 친일 감독 해리스 목사와 갈등하다가 어쩔 수 없이 상동청년회를 해산했으나, 스크랜턴은 미북감리회 선교회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어 1906년 총리사직에 이어 1907년 장로사직과 선교사직에서 사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인 행보에서 친일적인 정책을 유지한 감리회는 1907년대 이후 그의 행적을 기억하거나 강조하지 않았다.

▲&nbsp; 북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 참석한 해리스 감독(왼쪽)과 스크랜턴 의사(1905년). 1905년 한국감리회에 대한 감독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이전되자 해리스가 한국을 관할했다. 스크랜턴 총리사가 해리스의 지나친 친일 정책을 반대하면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907년 선교사 사임 후 정부 병원인 대한의원(현재 서울대학교병원 박물관 건물)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1909년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가 사망한 후 서울에서 사설 요양원을 운영했다. 1911년 운산금광회사 부속 병원에서 잠시 근무했고, 1912년 서울에서 사립 시란돈병원을 개설하였으며, 잠시 사위가 있는 중국 대련에서 의사로 활동했으나, 결국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 해성병원에 취직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을 진료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먼저 교통사고를 당해 고통을 당했고, 이어서 나가사키 영사였던 둘째 사위가 자살하면서 상심 속에 1922년 3월 쓸쓸히 사망했다. 한국에서 조촐한 추도식이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 그는 잊혀진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 여사는 이화학당과 함께 기억되고 추앙되었으나, 스크랜턴 의사를 기억할 시병원도 없었고, 그가 목회한 상동교회도 그를 별로 기억하지 않았다. 다만 1934년 감리회 한국 선교 50주년 때 노블 선교사가 초기 개척 역사를 소개할 때 그를 4쪽에 걸쳐 제법 상세히 언급했을 뿐(W. A. Noble, "Pioneers of Korea," Within the Gate, 26-29) 이후 다시 망각되었다. 상동교회가 전덕기를 기억할 때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으나, 2008년에 와서야 '스크랜턴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이와 달리 아펜젤러는 1902년에 사망함으로써 해리스와의 갈등도 없었다. 오히려 해상 사고에 의한 그의 비극적인 순직은 영웅적인 죽음으로 칭송되었고, 1912년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쓴 <아펜젤러 전기>(The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New York: F. H. Revell Co.], 1912)까지 나오면서 한국 감리교의 첫 선교사로 추앙받았다.

설립 기관과 후손의 힘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의 설립자요, 스크랜턴은 시병원과 상동감리교회의 설립자이다. 그러나 시병원은 일찌감치 사라졌고 상동교회도 정동교회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더욱이 배재 출신이 감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배재와 함께 막강한 힘을 가진 이화는 그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을 대부인으로 부르며 기억해 왔으나, 스크랜턴을 기억해 줄 제자나 목사는 별로 없었다.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학교 교장으로,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배재학교 교장으로 오래 근무하며 감리회에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그들은 모두 아펜젤러는 알았지만 스크랜턴은 몰랐다. 반면 스크랜턴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만 넷이었다. 딸들이 장성해 두 명이나 한국에 왔지만 곧 외교관들과 결혼하고 한국을 떠났다. 1913년 이후 스크랜턴 이름을 언급해 줄 후손이나 제자가 없었다.

아들 선교사가 없어 잊혀진 선교사 가운데에는 게일이 있다. 그는 헤론의 두 딸을 자신의 딸로 입적해 성장시킨 후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할 정도로 잘 키웠으나, 그 두 딸도 외교관과 사업가와 결혼하면서 곧 한국을 떠났다. 무엇보다 자녀 없이 수고하고 봉사한 독신 여자 선교사(의사, 간호사, 교사)의 경우에는 지금도 그들의 후손이 없어 자료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

▲&nbsp; 1892년 스크랜턴 가족. 그에게는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2세가 없었다.
▲ 1900년 아펜젤러 가족.&nbsp; 중앙에 이화의 교장이 된 큰딸 엘리스(중앙)와 배재의 교장이 된 아들 헨리가 있다.

1934년 노블이 기억한 스크랜턴

초기 선교사로 내한하여 평양과 서울 지역에서 활동한 노블은 스크랜턴을 어떤 인물로 기억하고 평가했을까? 그는 스크랜턴을 소개하는 첫 문장을 "한국에서 우리(감리회)의 첫 정규 거주 사역의 시작은 스크랜턴 의사에게 공을 돌려야 한다"고 시작했다. 그가 한국 선교사로 1884년 10월에 먼저 임명되었고, 목사 안수도 12월 4일 먼저 받았다. 비록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1차 서울 입경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2차로 5월에 시도하여 성공함으로써 첫 서울 거주자가 되었고, 제중원에서 6주일간 알렌을 도와 사역했다. 이후 6월 21일 헤론이 도착하자 스크랜턴은 정부 병원인 제중원을 나와 감리회 선교 사업으로서 의료 사역을 시작했다. 또한 선교회 부동산을 매입하여 입경하는 가족과 아펜젤러의 주택을 마련했다.  

▲ W. A. Noble, "Pioneers of Korea," Within the Gate (1934), 26

노블의 이 1934년 글을 인용하는 이덕주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 첫 부분을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스크랜턴이 감리회의 첫 주재 선교사였다는 노블의 말은 생략하고 이어지는 글들만 번역해서 설명했다. 곧 그의 신사답고 냉철한 성격, 의사로서 학구적인 성실성, 과묵함을 언급한 후 다음 내용을 인용했다. (재번역했다.)

스크랜턴 의사는 본질적으로 신비가였다. 이 점에서 그는 존 웨슬리의 제자였다. 그는 영적인 가치에 대한 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기뻐했으며, 그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분명한 실재였다. 교회의 예전은 기쁨이었고, 그의 기독교인의 삶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인들은 의례와 제사를 좋아하므로 선교사들은 개종자의 이 성향을 배양해야 하며, 따라서 최상의 감리교회 형식의 예배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동양의 철학들과의 접촉점을 늘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인격의 변혁을 지속적으로 가르칠 것을 주장했다. 복장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는 우리 가운데 성직자로 인식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Noble, ""Pioneers of Korea," Within the Gate, 28-29.

사상은 자유로워 동양 종교와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모색했고, 예배에서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례를 중심했으며, 옷을 입을 때는 (위의 1905년 사진에서 보듯이) 양복에 넥타이를 하는 스타일 대신 반드시 로만 칼러를 한 목사복을 입었던 그였다. 말과 외양과 행동에서는 예의 바르고 분명한 그였지만, 내면적으로는 부드럽고 신비를 추구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인의 영성과 종교 의식과 생활 예절과 어울렸다.

노블은 이런 스크랜턴 목사였기에 그의 제자인 전덕기 목사도 동일한 삶을 살았다고 보았다. 스크랜턴 집에서 요리사로 몇 년을 지냈던 전덕기는 "나는 의사 스크랜턴 선생님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나도 그처럼 되고 싶습니다"고 고백하고 목회자가 되었고 당대 최고의 설교자가 되었다. 전덕기도 스크랜턴처럼 민중을 돕는 애린의 정신,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일찍 죽었다. 비록 스크랜턴과 전덕기는 현실에서는 소수자로 살았으나 믿음으로 살았기에, 이제 죽었으나 말하는 자들이 되었다.

결론

감리회는 올해 다시 1885년 4월 5일을 크게 기념하면서 아펜젤러와 매클레이를 부각시켰다. 인천내리교회는 130주년을 기념하고 여러 해 전부터 아펜젤러를 설립자로 기억해 왔다. 정동제일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도 모두 아펜젤러나 그의 후손이 활동했으므로 그를 기리는 행사를 했다. 그러나 서울에 처음 주재하면서 첫 감리교회 선교 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한 의사 스크랜턴 목사는 올해 어떻게 기억되고 기념되고 있는가? 그나마 이덕주 교수의 책과 올해 봄에 <국민일보>의 연재물이 나와서 다행이다.

역사가 늘 승자의 기록만은 아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무죄한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역사의 실패자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유대 종교와 로마 제국의 정치에 의해 핍박들 받고 죽거나 흩어진 역사의 소수자들의 삶을 서술한다. 하지만 이 약자들이, '을'들이 쓴 글이 2000년 인류사를 바꾸어왔다. 감리회 선교 130주년을 보내는 올해, 인천과 서울에서 기억되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을 보면서, 전자와 함께 후자를 기억하는 감리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스크랜턴을 한국 감리회 첫 선교사로 복권해야 한다.

(201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