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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교회 건축, 1895년

다음은 김경열, <냄새나는 예수>(홍성사, 2015)에 나오는 소래교회와 새문안교회 예배당 건축 중 소래교회에 대한 글이다. 어제는 새문안교회 부분만 보았는데, 어떤 분이 앞부분을 보내어 주어서 검토해 보았다. 역시 매 문장마다 오류가 있는 글이라 놀라면서, 내 나름대로 수정해 본다. 소래교회 설립과 같은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사실을 서술할 때는 좀 더 여러 책을 읽고 신중하게 써야 한다. 붉은 부분은 오류이거나 근거가 없는 상상적 표현이다. 편의를 위해서 문장 앞에 번호를 붙였다. 내가 수정하거나 설명한 부분은 [ ] 안에 청색으로 쓴다.

--------------본문

"다음에서 소개할 조선 최초의 교회들의 두 가지 사례는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의 바람직한 선교 정책과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이야기해 준다소래교회는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다. 1884년에 서상륜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교회는 처음에 약 20여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소래 마을에서 그들이 모인 예배당은 조선 관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련된 산간 구석의 초라한 초가집이었다고 전해진다. 머지않아 소래 마을은 58세대 중에 50세대가 복음을 받아들인 가운데 소래교회에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자연히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마을은 공동 의회를 열어 교회 건축을 결정한 뒤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에 필요한 헌물과 헌금을 모았다. 당시 소래교회는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의 지도를 받고 있었지만 순수한 조선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했는데, 건축비로 현금만 17만 냥이나 드는 큰 공사였다. 조선인의 교회를 조선인의 힘으로 세우는 이 운동에 심지어 동학도들도 건축 헌금에 참여하여 소래교회 건축을 도운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당시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이 종파를 초월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현금 외에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선산의 품질 좋은 소나무를 건축 자재로 기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수십 일을 건축을 위해 봉사했다. 소래교회 건물이 들어선 자리는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서낭당 자리였다. 우상 숭배의 장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한편 소래교회 건축 소식은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도 들렸다. 소래교회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소래교회의 재정 형편을 잘 알기에 미국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건축 자금 일부를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소래교회 성도들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서상륜은 “그 제안은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1895년 7월 8일, 드디어 8칸짜리 기와지붕의 소래교회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는 또한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이 순전히 조선인 자력으로 지어진 교회였다."

----------분석과 정정: 이 짧은 글 (13개 문장)에 13개의 오류가 있다.

1. 소래교회는 한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다. 1884년 서상륜의 주도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 교회는 처음에 약 20여 명의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설립일은 공식적으로 1925년 8월에 40주년 행사를 했으므로, 1886년 8월 1일을 설립일로 보는 게 좋다. 참고)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259. 아니면 <한국기독교와 역사 1>에 나오는대로 1885년으로 하면 된다. 1884년 설은 너무 옛날 책에 나오는 표현이다.]

[1884년에 20명이 모인 게 아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때 교인은 10명이 되지 않았다. 소래에서 첫 세례식은 언더우드에 의해 1887년 10월 30일 거행되었는데 (Underwood to Ellinwood, 1887. 11. 27) 그때 9명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들은 서상륜(1882년 심양에서 로스가 세례),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이 3명은 1887년 1월 서울에서 언더우가 세례) 외에 10월 30일 세례를 받은 4명과 다른 한 사람이었다.]

2. 소래 마을에서 그들이 모인 예배당은 조선 관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련된 산간 구석의 초라한 초가집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래는 60호 정도의 작은 마을로 관청은 없었다. 감시 때문이 아니라 소수의 교인이 예배당을 짓기 전에 모이는 곳이 필요했기에 한 초가집에서 모였을 뿐이다.]

3. 머지않아 소래 마을은 58세대 중에 50세대가 복음을 받아들인 가운데 소래교회에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것은 후대의 일이다. 언더우드의 아래 글(1899-1900)에 따르면, 1890년 봄, 회원이 10여 명이었을 때, 소래교인은 당회장인 언더우드 목사에게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했다. 언더우드는 자립으로 지으라고 말하며 지원을 거부했다. 소래 교인들이 자립적으로 변하는 것은 매켄지의 사역 때문이었다. 소래 교회 예배당을 자립으로 지은 것은 언더우드의 충고 때문이었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언더우드가 보낸 매켄지가 신실하게 그들을 양육했기 때문이었다. http://koreanchristianity.cdh.ucla.edu/images/stories/1900_underwood___.pdf?fbclid=IwAR3fC0Jebil3qVVMGi-mPzflH_RwGIo7TkQIb2AoYb31lK1_atduSjkZS5s]

4. 자연히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고, 마을은 공동 의회를 열어 교회 건축을 결정한 뒤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에 필요한 헌물과 헌금을 모았다.

[60호 마을에 10명 교인인데 어찌 마을 공동의회를 열겠는가?]

5. 당시 소래교회는 캐나다 선교사 매켄지의 지도를 받고 있었지만 순수한 조선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했는데, 건축비로 현금만 17만 냥이나 드는 큰 공사였다.

[소래 교인들은 산에 있는 나무를 기증하고 그것을 운반할 소와 일꾼을 제공했다. 건축하는 목수들에 대한 음식도 제공하는 자원자도 있었다. 하지만 현금을 기부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한 양반가의 부인이 조개를 주워서 팔아서 헌금하기도 했다. 터는 과거 마을 제사(당제)를 드리던 곳으로 마을 중앙에 있는 언덕 위였다. 예배당 뒤에는 신목을 그대로 두었다. 건물은 가로 35자 x 세로 20자의 기와집이었다. 비용은 17만 냥이라고 하지만, 1달러가 2엔이고 (환율이 늘 변했지만) 1,500냥이면 85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 새문안교회당 12간 기와집을 토지 포함 500달러로 지었다면, 대지를 기증 받아 시골에서 지은 8간 집이면 그 정도(85달러)로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즉 17만 냥이라는 돈은 생각보다 거금이 아니며, 一자형 작은 기와집이라 큰 공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8일 만에 집을 다 지었다. 교인이 늘자 한 해가 못되어 앞에 방 두 개와 마루가 있는 한 채를 덧붙여서 T자 형으로 만들었다.]

6. 조선인의 교회를 조선인의 힘으로 세우는 이 운동에 심지어 동학도들도 건축 헌금에 참여하여 소래교회 건축을 도운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당시 외세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의 민족정신이 종파를 초월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해주 지역 북접 동학은 1895년 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 일부가 개신교에 입교했다. 동학도로서 헌금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헌금했다. 소래에서 두 교도는 우호적 관계였다.]

7. 현금 외에도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선산의 품질 좋은 소나무를 건축 자재로 기증했고, 많은 사람들이 수십 일을 건축을 위해 봉사했다.

[수십 일이 아닌 8일에 끝난 간단한 집짓기였다.]

8. 소래교회 건물이 들어선 자리는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서낭당 자리였다. 우상 숭배의 장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바뀐 것이다.

[마을 동제를 드리던 초가집 사당을 가지고 있던 가난한 과부가 개종하고 대지를 교회에 헌납했다. 그것이 “수백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귀신을 숭배했던 곳인지는 알 수 없다.]

9. 한편 소래교회 건축 소식은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도 들렸다. 소래교회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소래교회의 재정 형편을 잘 알기에 미국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건축 자금 일부를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3번 설명을 보라. 그 반대로, 언더우드는 소래 교인들이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거절했다.]

10. 그러나 소래교회 성도들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서상륜은 “그 제안은 고마운 일이나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의 원조를 받는다는 것은 본의에 어긋나는 일이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명예롭지 못한 일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출처가 궁금하다. 9번이 사실이 아니고 정반대이므로, 이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11. 이렇게 해서 18957월 8일, 드디어 8칸짜리 기와지붕의 소래교회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교회는 1895년 7월 7일 헌당되었다. 완공된 것이 아니다. 매켄지의 사망으로 그의 장례식을 위해 언더우드가 소래로 가서 7월 첫 주일인 7일에 헌당했다.]

12.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는 또한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이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이 순전히 조선인 자력으로 지어진 교회였다.”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아니다. 1895년 4월 평북 순안장로교회가 외국인의 도움 없이 한 국인만의 돈으로 건축되었다. 그 비용의 절반은 평양의 최치량이 헌금했다. 따라서 한 교회 교인들의 완전 자급으로 지어진 교회는 1895년 7월에 헌당한 소래교회였다.]

소래교회, 1898년 사진. 앞 채를 덧붙여 뒷쪽의 일자형 집과 함께 T자형이 되었다. @Moffett Korea Collections, P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