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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건축물

용산 일본군 조선주차사령관 관저와 제2 조선총독 관저

용산에는 일본군 주차군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여 군사 요새로 만들었고, 철도와 대로에서 접근이 용이한 곳에는 사령관 관저를 건셜했다. 그런데 사령관 관저가 1910년 통감/총독의 관저로 바뀐다. 

1910년 완공된 용산의 사령관 관저, 조선총독 관저로 용도 변경됨

용산 일본군 병영 안에 있었던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 한강통 11-43번지)의 정면 모습을 담은 채색 사진엽서이다. 용산총독관저는 원래 하세가와가 ‘한국주차군사령관 관저 용도로 세웠으나, 너무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립된 탓에 총독 관저로 전용되었다. 하세가와는 1916년 제2대 총독으로 부임해서 이 공관을 사용했다.

"작년 12월에 필역된 용산 일군 사령관의 숙사는 기지가 6백여 평이오 그 집 짓는 부비가 오십만원에 달하였는데, 그 집 제도가 극히 굉장하므로 이 집을 통감의 관사로 쓰고 일본군 사령관의 숙사는 다시 짓기로 지금 의론하는 중이라더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16일자)

용산 일본군 조선주차군 사령관 관저
용산 일본군 조선주차군 사령관 관저, 1913

 

용산의 조선총독 관저는 현 121병원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에 있었다. 6.25전쟁 때 상당부분 파괴되었다.

용산 조선 총독 관저
용산의 조선 총독 관저
용산 조선총독 관저

통감부 시절 경호에 유리한 남산에 ‘남산 총독 관저’를 지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용산 총독 관저는 거리와 관리 비용의 문제로 귀빈의 숙소나 각종 환영회 같은 행사가 이뤄졌을 뿐 거의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다.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阿房宮)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 중에 러일 전역비의 잉여금 50만원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 --후지무라 토쿠이치(藤村德一), <거류민지석물어>(1927)

남산의 관저에서는 광화문으로 오는 길이 편했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가 주변 대로를 감시하고, 남산 주둔 일본군이 경호했다. 

1939년 9월 22일 경복궁 뒤편 경무대(景武臺)에 총독 관저가 신축되어 사용될 때까지 사용했다. 

남산의 통감부, 왜성대
남산의 조선총독 관저,원래는 조선통감 관저, 1906-


그래픽으로 재현한 경무대 총독 관저, 1939-45

일제는 경무대에 있던 전각들을 헐고 공원부지로 만들었는데, 1937년 이 지역을 조선총독부 조선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관저를 세웠다. 이때 지붕은 보천교(普天敎) 본당이던 십일전(十一殿)의 화려한 청기와를 가져왔다. 그래서 관저 지붕이 푸른색이었다. 1939년 완공 후 6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청와대와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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