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크리스마스, 14,000명이 구원선 안에서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1. 흥남 철수 사진의 진실 (1950. 12. 22-24)
다음 첫 두 사진을 보면 흥남철수는 평온한 가운데 질서정연하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피난민이 승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영화 <국제시장> 첫 부분은 너무 많이 틀렸다고 하면 곤란하다.
15일부터 시작된 철수 작전에는 군함과 상선 200여 척이 동원되었고, <국제시장>에 나오는 철수 장면은 마지막 군 상선/화물선인 빅토리 호 승선을 좀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는 다큐가 아니다. 그러나 첫 사진만 가지고 혼란과 안타까운 죽음이 없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흥남항으로 갔다. 당시 흥남항은 미군과 한국군 10만 5천 명과 피난민 9만 명이 운집하여 혼잡한 상태였다. 이미 다른 군함과 상선, 어선들을 통해 철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즉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됐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의사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빅토리 호에 화물과 무기를 싣는 대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큰 짐은 버리고 승선해 모두 14,000 명이 탈 수 있었다.
어떤 사실을 볼 때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함께 보아야 한다. 사진 한 장만으로는 10일 동안 이루어진 군인 10만 명 이상, 피난민 9만 명의 탈출을 다 묘사할 수 없다. 한 사건이나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2. 문재린, 문익환, 문재인
1950년 12월 함흥 성탄절 대구조로 1만 4천 명이 출북한하여, 그 중 상당수 함경도 피난민들이 거제도로 왔다. 그 중에는 문재린-문익환, 문재인 부모 가족도 있었다. 아래 사진은 1951년 문 목사 가족이 옥포교회 앞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거제도로 피난을 왔다. 거제면 명진리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나중에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하청으로 이사를 와서 자랐다고 한다. 바로 내가 자란 동네이다. 그곳에 조금 있다가 부산 영도로 갔다.
김영삼은 장목면 대계(큰닭) 마을[지도에서 붉은 점]에 태어났다. 높은 대금산 아래 동쪽으로 너른 바다를 보며 어장을 하는 큰 부잣집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강하고 대망을 품은 듯하다.
문재인은 흥남 탈출의 일원으로 거제도에 피난을 온 가난한 부모 밑에서 거제면 명진리[지도에서 푸른점]에서 태어나 6-7세까지 자랐다. 거제도 중앙의 계룡산의 지류인 낮은 뒷산과 섬으로 막힌 호수 같은 바다를 보며 자랐다. 그래서 명석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미치지 않고 과묵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듯하다.
문재인은 흥남 탈출의 일원으로 거제도에 피난을 온 가난한 부모 밑에서 거제면 명진리[지도에서 푸른점]에서 태어나 6-7세까지 자랐다. 거제도 중앙의 계룡산의 지류인 낮은 뒷산과 섬으로 막힌 호수 같은 바다를 보며 자랐다. 그래서 명석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미치지 않고 과묵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듯하다.
한국전쟁 때 많은 교회, 학계 지도자들이 거제도로 피난을 와서 교회와 학교 수준이 갑자기 상승했다. 포로수용소를 설치해서 수많은 포로도 살렸다.
조선 시대 귀양오는 양반들을 가장 많이 받아 준 거제도가, 한국전쟁 때는 북한 피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서 살려주었다. 거제가 巨濟라 구제의 땅이다.
휴전 후 교육을 잘 받거나 장사를 하던 피난민들은 거의 대부분 육지로 돌아갔지만, 농사를 짓다가 온 시골 출신 피난민은 거제도에 정착했다.
거제 교인들은 연세, 장신, 한신 등 대학교와 신학교에 토지를 기증하여 재단법인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몇 년 간 잘 교육한 결과였다. (거제도 사람들이 착하다^^)
내가 자랄 때 하청교회는 포로수용소 채플을 뜯어서 옮겨와서 그 나무로 지었다. 아마 하청교회 장로님들에 유지가 많아서 그런 정치력이나 계산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루나무가 미제였으므로 꽤 좋았다. 그 마루에 꿇어 앉아 주일예배, 수요예배, 여름성경학교, 성탄 성극을 하면서 내 유치부 유년부 신앙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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