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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스

1887년 9월 로스의 서울 방문과 새문안교회 조직

J. F. Schöneiche to H. F. Merrill, “Monthly Report,” 24 October, 1887 (No. 3.), 海關稅務司(朝鮮) 편,  『海關誌 Jenchuan』 (국립중앙도서관 古貴 659-14), 254~255.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p. 254
p. 255. 첫 줄에 로스를 언급하고 있다.

한반도의 개항을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쇠네케가 메릴 총세무사에게 올린 10월의 월례 보고서는 9월 17일부터 10월 16일까지를 다룬다. 인천항 방문자들의 이름과 직책을 기록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로스였다. 전문을 보자.

 방문자. 8월[음력]에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제물포를 방문했으므로, 저는 더 저명한 분들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곤도 Kondo(상해 총영사로 임명된 타카히라 후임으로 서울에 가는) 신임 일본 대리대사, 러시아 대리대사 베베르 Waeber, 독일 대리총영사 크리엔 Krien, 영국 제독 해밀턴 Hamilton,[1] 영국계 스코틀랜드인 비커스테스 Bickersteth[2], (조선어 문법으로 유명한) 로스 Ross 목사, (정치적 사안으로 천진의 이홍장에게 가는) 미국 대사 딘스모어 Dinsmore 경과 데니 Denny 판사[3]. 고종 폐하가 새로 만들어진 워싱턴의 조선공사관의 서기로 임명한 서울의 미국 장로회의 알렌Allen 의사는 조선 대사에 앞서 서울에서 이곳에 9월 30일에 도착했습니다.[4] 그는 아직 이곳에서 그의 조선인 대사가 서울에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미국으로 갈 것입니다.[5]

유명 방문객이 많아 입항일과 출항일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지 않아서, 로스의 입항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첫 방문자인 도 마스케(近藤眞鋤) 일본공사관 대리공사가 9월 20일에 입항하여 그날 서울에 부임했고,[6] 10월 2일 도착의 비커스테스 뒤에 로스가 나오고, 이어서 9월 24일 제물포에 도착한 딘스모어 주한미국공사와 9월 30일에 도착한 데니 판사를 한 묶음으로 언급한 후, 견미 사절단의 일행인 알렌이 9월 30일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했다.[7] 따라서 로스는 9월 21~9월 30일 어간에 제물포에 입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890년 로스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9월 27일 인천에 도착했고, 서울에는 밤에 도착하여 헤론 의사의 안내를 받아언더우드 사택 사랑채로 가서, 새문안교회가 조직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새문안교회가 왜 9월 20일이나 25일이 아니고, 27일에 조직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언더우드와 헤론의 적극적인 전도를 반대하던 알렌이 견미사절단의 일원으로 9월 23일 서울을 떠나 제물포로 갔고, 9월 27일 로스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알렌은 정부병원인 제중원 원장 겸 고종의 시의로서, 자신과 선교회가 누리는 특혜와 입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언더우드의 불법적이고 공격적인 전도 활동을 반대했다.[8] 따라서 언더우드와 헤론은 알렌이 23일 서울을 떠나고, 27일 로스가 서울에 도착하자 바로 그 날을 교회 조직의 D-day로 잡아 교인들을 소집했을 것이다. 교인들이 모두 서울에 거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렌은 9월 23일부터 10월 초까지 제물포의 대불호텔에 머물면서 사절단이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의 신경이 온통 사절단의 미국행에 쏠려 있을 때, 언더우드와 헤론은 로스의 방문을 계기로 새문안교회를 조직하는 거사를 행했다. 만일 알렌이 서울에 있을 때인 9월 20일에 교회를 조직하려고 했다면 알렌의 반대에 부딪혀 성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옥성득, "18887년 새문안교회 창립일의 재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2023년 9월)을 보세요.


[1] 거문도사건(Port Hamilton Affair, 1884-1887)의 영국 해군 제독 해밀턴(Richard Vesey Hamilton, 1829-1912)이다.

[2] 일본성공회 선교사 감독 Edward H. Bickersteth(1850-1897)로 찬송가 작사가이기도 했다. 1887년 10월 2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Samuel Bickersteth, Life and Letters of Edward Bickersteth, Bishop of South Tokyo  [London: Low Marston, 1901], 162.)

[3] 1887년 9월 말에 출발한 조선의 견미사절단에 대한 중국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한 방문. 딘스모어는 건강을 회복 차 나가사키에 가서 24일 제물포 항에 돌아왔고, 데니 판사는 30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4] 고종 24년(1887) 5월에 도승지 閔泳駿을 주일관리공사로, 6월에 朴定陽을 주미공사로, 沈相學을 주영·독·러·프·벨기에 등 5개국 주재공사로 임명했다. 이에 원세개는 이홍장을 통해 조선 정부 내정 간섭에 나섰다. 주외국공사의 파견은 외교고문 데니(O. N. Denny), 참찬관 알렌(H. N. Allen), 민영익 등의 건의에 따른 것인데, 이들은 원세개의 횡포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주외국공사의 독자적 파견을 통해 조선이 자주국임을 천명하고 청의 종주권에 도전하고자 했다.

[5] J. F. Schöneiche to H. F. Merrill, “Monthly Report,” 24 October, 1887 (No. 3.), 海關稅務司(朝鮮) 편,  『海關誌 Jenchuan』 (국립중앙도서관 古貴 659-14), 254~255. 밑줄은 필자.

[6] Horace N. Allen, A Chronological Index: Some of the Chief Events in the Foreign Intercourse of Korea (Seoul: Methodist Publishing House, 1901), 21. 곤도는 1880년 부산의 일본영사관 영사였고. 1885년 서울 주재 일본공사였는데, 1887년 9월 20일에 부임하여 1891년 4월까지 근무했다. 알렌의 연대기에는 9월 서울 방문자로 워렌 감독과 곤도 공사만 기록하고 있다.  

[7] Allen's Dairy, September 24 & 30, 1887.

[8] H. G. Underwood to H. N. Allen, January 27, 1887; December 14,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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