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낙동장신(駱洞將臣) 이경하(李景夏)

1. 이인직의 《귀의 성》 (1908)을 보면 대원군 시절 포도대장 이경하가 두 번 나온다. 

"마누라님 마음이 약하신 고로 그런 꿈을 꾸셨소. 어젯밤에 하던 말이 마음에 겁이 나셨던가 보구려. 걱정 말으시오. 사람을 죽이고 벽력을 입으려면 낙동장신(駱洞將臣) 이경하(李景夏)는 날마다 벽력만 입다 말았게요…… 마누라님 마음에는 우리가 그런 일을 하면 무슨 벽력이나 입을 듯하지요. 흉즉대길이랍디다. 그런 꿈은 좋은 꿈이오." (16장)

"얘, 그러한 생각 말아라. 제가 잘되려고 사람을 어찌 죽인단 말이냐. 그런 생각만 하여도 벽력을 입을 것이다."

"낙동장신 이경하는 어진 도 닦으려는 예수 교인을 십이만 명이나 죽였는데, 어찌하여 그런 악독한 사람에게 벽력이 없었으니 웬일이오."

"이애, 네 말이 이상한 말이로구나. 제가 잘될 경륜으로 사람 죽이고 당장에 벽력을 입어서 만리타국 감옥에서 열두 해 징역하고 있는 고영근의 말은 못 듣고, 사십 년 전에 지나간 일을 말하는 것이 이상하구나. 이경하는 제가 사람을 죽였다더냐? 나라 법이 사람을 죽였지. 나라에서 무죄하고 착한 사람을 많이 죽이면 그 나라가 망하는 법이요, 사람이 간악한 꾀로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이 벽력을 입나니라. 왜 무슨 일 있느냐? 누가 너를 꾀더냐?" (17장)

2. 전주 이씨 이경하(李景夏1811~1891)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자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을 지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한성부판윤·형조판서·강화부유수·어영대장·공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1866년 병인사옥, 곧 대원군(大院君)이 천주교도를 크게 박해하던 해에 포도대장(捕盜大將)이었다. 그는 체포와 형벌을 도맡아 혹심하게 살육하였기에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추게 했다는 낙동대감(駱洞大監)’ 혹은 '낙동염라' 혹은 '낙동장신'으로 불렸다. 그는 백성이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겁을 주려고 종로 거리에 형장(刑場)을 가설하고, 우차(牛車)로 사지를 찢는 거열형(車裂刑)을 가했으며, 돌을 던져 석살(石殺)하게 했다. 수구문 밖에 수백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싸 놓도록 한 대원군의 주구였다

1882년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재직중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어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대원군의 깊은 신임으로 1884년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으로 복직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까지 지냈다.

그의 아들이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이다그의 후광으로 입각한 아들 이범진(李範晋1852~1910)은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아 궁중의 친일파를 몰아내는 일을 주동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조대비(趙大妃)와 민비, 뒤에 순종(純宗)이 되는 왕세자가 그의 집에 피신할 만큼 왕실과 가까웠다

이경하의 낙동(駱洞)집은 청의 공사관이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중화민국 대사관이 되었다가 중국과 수교 후에 현 중국대사관이 되었다.  한편 이범진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했을 만큼 그는 친러파(親露派)의 영수였다. 한일병합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1911년 1월 13일 권총으로 자살했다그의 아들은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위종(李瑋鍾, 1884~1924)이다.

3. <귀의성>17장에서 이경하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인 12만명을 죽였다는 것은 과장이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간 진행된 탄압으로 당시 8,000여 명의 한국인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처형되었다. 이경하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 때문에 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박해할 때 활약하였는데, 본인도 출세했고 자손도 잘 되었다. 벼락을 맞지 않아 <귀의성>이 그런 질문을 한 셈이다.

그 아들 이범진은 친러파가 되어 출세했고, 그 손자 이위종은 러시아 제국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 예하 3등 참서관 등을 지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부친 자살 후  이위종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러시아 제국 장교의 길을 선택했다.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다.

이경하-이범진-이위종 3대가 러시아로 인해 고위직을 누리고 출세했으나, 이범진은 자결했고, 이위종의 삶도 파란만장,  평탄치 않았다. 러시아인 부인 사이에 세 명을 딸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들과 그 자손들의 삶은 미미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헤이그 밀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7년

  

3대면 120~140년 정도이다. 한국 족보를 보면 30대손이면 긴 족보이다. 1,200년 정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4대, 140년만에 위기에 봉착했다. 하나님의 복은 천 대에 미친다고 했으니, 희망을 품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