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추도문

언더우드는 어떤 사람이었나: 넓은 날개와 불 동가리

첫 목회 선교사 언더우드: 넓은 날개불 동가리의 삶

내한한 첫 개신교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7. 1. ~ 1916. 10. 1.) 목사는 1859년에 태어나, 25세에 한국에 파송되어, 19161012일 미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32년간 봉사한 후 57세에 소천했다. 개척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40대에 백발이 되었으나, 늘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을 가진 청년으로 살았다.

한국인은 행동주의자요 열정가인 언더우드를 두 가지 별명으로 불렀다. ‘넓은 날개’(wide wings)불 동가리’(a bundle of fire). ‘넓은 날개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 그는 한 사람이 감당했다고 보기에는 엄청난 양의 다양하고 폭넓은 활동을 했다. 10년만 보아도, 제중원의 진료실 조수, 의학교 교사, 최초로 조직된 장로교회인 정동의 새문안교회 목사, 정동 고아원(경신학교의 전신) 원장, 전국을 누빈 순회여행 전도자, 서울의 새문안-독립문-여의도-김포-행주에서 황해도의 장연-소래-봉천-은율-곡산으로 이어지는 구역의 담당 목사, 선교회 회계, 사택과 학교 건물의 현장 감독, 신약 번역자회 회장, 전도문서 번역자, 찬송가 편집자, 사전과 문법서 편집자, 개인 인쇄소 운영자, 선교 전략가, 선교 기금 모금인, 선교사 모집자 등의 일을 했다. 그는 또한 선교사 학자로서 한국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불굴의 선교 열정으로 한국 교회를 타오르게 한 불 동가리의 측면은 사역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며 불타는 인생으로 살았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라는 업적과 함께, 그것을 가능케 한 그가 누구였는가라는 사람됨의 측면을 살펴보아야만 우리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빚진 자

1881611, 이민 1.5세인 언더우드가 뉴욕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대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던 졸업식 날,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그 절대적 상실감을 통해 이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 천 명씩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영혼이 있다는 다른 절박한 현실을 보았고, 그들에게 하루 바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명을 발견했다. 

언더우드는 뉴브룬스위크 신학교 3년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칠 것”(고후 9:16)이라는 말씀을 붙잡고 모든 종류의 전도 사역에 참여했다. 교수들은 매일같이 수업을 마치면 바로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하는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우선권은 복음 선포와 영혼 구원에 있었다. 친구들이 붙여준 고함치는 감리교도라는 별명처럼, 그는 길에서 구세군과 함께 전도할 때나 시골 교회 부흥회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힘차게 찬송하며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신학교 졸업 후 인도 선교사로 준비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던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문이 열렸으나 갈 자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곳에 갈 자를 물색했다. 그가 인도 선교사로 자원하려고 원서를 보내려고 하던 순간 언더우드는 왜 나는 한국에 가지 않는가?”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하나님의 소명은 어느 날 하늘 문이 열리고 신비한 음성이 들려오는 방법보다는, 우리 눈앞에 죽어 가는 세계의 참상을 펼쳐 보여주시고, 흑암 속에 있는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달라고 부르는 소리로 다가온다. 언더우드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한국을 향해 출발했고, 188545일 부활절 주일 오후에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제물포 항에 내렸다. 

이후 6년간 한국 선교를 개척하면서 언더우드는 자신을 시혜자로 여기지 않고 한국인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로 섬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1893년 가을 그가 자비로 찬양가를 편집할 때 신명 용어 문제로 비판을 받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찬송가 때문에 다른 선교 사업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직접 집을 건축하면서도 한국에 온 후에 다른 선교회 회원보다 더 많은 전도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무슨 공치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의식을 주시고, 많은 것을 견딜 수 있는 체질과 체격을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찬송가 작업을 하는 동안 비록 기온이 화씨 90도에서 10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였지만 나는 매주 17번의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언더우드가 32년간 한결같이 선교사로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을 갚고 를 면하기 위해 충성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1886년부터 네비어스와 로스로부터 자급, 자전, 자치의 3자 원칙을 배우고, 이를 한국에 적용하면서 모든 신자는 자신의 일터에서 자원하는 평신도 전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도, 바로 모든 신자는 빚진 자라는 바울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였다. 한국 교회는 바울과 언더우드의 모범을 따라 날 연보를 드리며 을 갚아 나갔다. 그것이 한국 초대 교회가 근대 선교사상 가장 빨리 성장한 첫째 이유였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1900년 뉴욕에서 열린 에큐메니컬선교대회에서 한국교회가 시험하고 증명한 자급의 원리를 다른 선교지에 적용하면 신속한 세계 복음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사람

언더우드에게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고후 5:14)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는 1886511일 한 명의 소년으로 정동에서 고아원을 개설하면서, 미래의 한국을 책임지는 그리스도인 청소년을 육성할 꿈을 꾸었다. 그는 길거리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모아 의식주를 제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양육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곧 많은 소년들을 붙잡아서 미국에 노예로 보내려고 한다. 그들을 살지게 먹여서 잡아먹으려고 한다. 그들에게 마술을 걸려고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기독교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한 한국인들이 퍼뜨린 악소문이었다. 그래서 제중원 수술실에서 아이들을 잡아 눈을 빼서 사진기를 만들고, 아이들 몸으로 성찬식 때 먹이는 마약을 만든다는 소문을 믿은 일부 군중들이 이화학당과 제중원을 공격하는 영아 소동(Baby Riot)이 일어났다. 그러나 소동이 진정되고 고아원이 정상을 되찾은 후, 아이들은 언더우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생명수 마시듯이 경청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언더우드가 가르친 메시지의 핵심이었다. 그는 188710월부터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가면서, 만일 그리스도만 전하고, 그의 사랑의 메시지를 들려준다면, 나머지는 주님과 살리시는 성령의 능력에 맡겨야 한다.”는 믿음으로 복음의 씨를 뿌렸다. 1888년 봄, 명동 천주교 성당 건립 문제로 한국 정부가 모든 기독교 선교 사역을 중지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미국 공사가 지방에 나가 있는 언더우드를 소환했을 때, 언더우드는 

우리는 사람들을 향한 불멸의 사랑의 메시지가 있으므로 입을 막고 있을 수는 없으며 그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한다.”

고 대답했다. 반대는 그곳에서 멈추어 버렸다. 언더우드는 사랑의 메시지를 가진 불 덩어리였다. 

1898년 뉴욕에 있는 형의 언더우드 잉크와 타자기 회사가 세계 제일의 회사로 발돋움할 때, 형이 미국으로 와서 사업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내한한 캐나다 선교사 그리어슨 의사 등을 데리고 함경도 탐사 여행을 하던 어느 날 한 시골 들판에서 그 편지를 보여준 뒤 그리어슨 의사가 보는 앞에서 편지를 찢어버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이 아닌가!” 

전진! 앞으로!”의 사람

언더우드를 비롯해 처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사역을 준비하면서 자연히 다른 선교지의 초기 선교 역사를 공부했다

우리는 저드슨이나 다른 개척 선교사들이 어떻게 수 년 간이나 수십 년 간 단 한 명의 개종자 없이 일했는지 보았다. 우리는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아무런 열매를 보지 못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꾸준히 일했는지 보았다. 우리는 심지어 일본에서도 첫 개종자의 세례까지 10년을 기다렸고, 6명의 교인으로 첫 교회를 조직할 때까지 12년을 기다린 것을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기초를 놓고 땅을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고, 최소한 수년간은 개종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씨를 뿌리러 온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희어져 추수하게 된 들판에서 추수하기에 바빴다. 그러므로 내한 1년이 조금 지난 1886718일 노춘경에게 첫 세례를 베푼 후 언더우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가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국을 가로막았던 법적인 장애물을 깨트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준비시켜 주셔서 우리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첫 열매들을 바라보고 있다.”

언더우드는 가라!”고 명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마태 28: 19-20)과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확신했다. 따라서 그의 표어는 전진! 앞으로!”였다. 그는 본국 교회에 추가 선교사를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질문했다

우리가 중단해야 합니까, 아니면 전진해야 합니까?”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더우드의 확신은 1890년 네비어스 목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더욱 강화되었다. 중국에서 40년간 활동하고 은퇴를 앞 둔 네비어스는 선교 방법의 차이로 갈등하던 서울의 젊은 선교사들에게 네비어스 방법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 이후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의 전망을 묻는 자들에게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만큼 밝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르신다. 그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면 성공은 반드시 그리고 확실히 따라 올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의 불 동가리에서 나오는 전진 정신은 공격적인 북한 전도 여행과 한국 전체를 포괄하는 선교 전략에서 잘 드러났다. 1887년 이후 언더우드는 거의 매년 북한 지방에 전도여행을 갔고, 전국 8도의 감영 소재지마다 최소한 한 명의 목사와 한 명의 의사를 가진 선교지부를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내륙 지방에 선교의 자유가 없던 1888년에 벌써 평양에 선교지부를 설치할 뜻을 세웠고, 마페트가 도착하자 1890년에 한번, 1891년에 두 번, 1892년에는 무려 6번이나 평양을 방문하도록 해서 1892년에 선교지부를 설치했다. 언더우드는 선교에 위기가 올 때마다 외쳤다

우리는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일 그 명령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전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소망의 사람

언더우드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면 종말이 올 것이라고(마태 23: 14) 믿었다. 그는 선교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고 앞당기는 선도자라는 종말론적인 선교 이해를 가졌다. 그는 이 세대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학생자원선교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전천년설적인 소망은 그리스도 없이 죽어 가는 자들의 절망과 결합되면서 강한 선교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멈춘 적이 없었다. 또한 그가 한국인들을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이 소망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그래서 한국 교회는 일제 치하의 고난 하에서 하나같이 그날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인내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한국 사역 초기부터 한국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기도했다. 성령 세례가 종말론적인 기대와 인내를 유지해 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유교 문화에서 머리로만, 교리로만 믿는 신자가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으로 믿는 신자들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선교사는 서서 일하는 데는 좀 더 적은 시간을 들이고 무릎을 꿇고 사역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칙의 사람

언더우든 원칙이 걸린 문제에서는 필요하면 죽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영국 불독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번 선교회에서 모든 선교사들이 어떤 의견에 찬성해도 홀로 반대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그는 "불가능을 일소에 부치고 무엇이든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말하라."는 표어를 좋아했다. 그를 만나는 자는 그가 마치 타오르는 횃불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 모두 그를 지치지도 않고 놀라운 인내력을 가진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라고 평가했다. 

그의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성품을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8871, 아직도 기독교 선교의 자유가 없을 때, 소래에서 3명의 신자들이 언더우드를 찾아와서 예수를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 왕이 목을 쳐도 좋다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했다. 알렌 의사는 정부 관리로서 반대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선교 역사를 볼 때 정부가 선교를 금지하더라도 길이 열리면 불법이라도 우선 은밀히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중국에서 모리슨은 위험을 무릅쓰고 1814년 첫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1858년에 가서야 선교의 자유가 조약 문구에 삽입되었다. 일본도 선교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후에 선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한국도 동일한 과정을 밟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전형적인 미국의 행동주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적극 전도론이 알렌 의사의 신중론을 이기면서 한국 초기 선교는 공격적인 전도 정책으로 나아갔고, 정부가 이를 묵인하면서, 한국 교회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 

정통교리와 정통실천을 통합한 사람

언더우드는 장로교인 중에 장로교인이요 정통파 중에 정통파였지만, 믿음에서의 정통 교리와 생활에서의 정통 실천을 통합한 자였다. 그는 복음 전도와 개인 영혼 구원의 우선권을 믿었지만, 교육과 의료 사업의 자체 가치를 믿었고, 기독교 문명과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를 통한 한국 사회 전체의 기독교화, 곧 기독교를 통한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믿었다. 그래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기독교대학을 설립하려고 했고, 1896년부터 독립협회의 시민운동, 교육운동, 정치운동을 지지했다. 평양의 선교사들이 전도와 영성 중심의 교회선교 모델을 지지할 때, 언더우드는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서 교육과 의료와 전도가 함께 가는 하나님의 나라선교 모델을 지지했다. 그의 마지막 사업이었던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 설립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려는 시도였다. 

언더우드는 32년간의 선교사 생활 가운데 끊임없는 질병은 물론 오해와 시기와 비난을 견뎌야 했고, 그래서 선교본부에 여러 번 사직서를 냈으며, 티베트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역경을 그는 '불 동가리' 선교 사명과 사랑으로 극복했다.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그는 '넓은 날개'를 타고 높이 올라가 곧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정확히 바라보면서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왕과 함께 거닐면서도 고아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신감을 잃고 비난할 때에도 의연히 머리를 들고 있는 자, 모두가 의심해도 자신을 믿는 자,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 자, 꿈을 꾸지만 그 꿈을 불변의 지침으로 만들지 않는 자, 모두가 지쳐 떠나버린 뒤에도 자리를 지키며 주님이 주신 일에 자신의 심장을 드리는 자, 그가 바로 언더우드였다. 

사업가로서의 경영 마인드, 목회자로서의 영혼 구원의 열정, 교육자로서의 성실성, 학자의 정직성과 역사의식, 성경 번역자로서의 감수성과 치밀함, 이 모든 것을 갖춘 지도자가 언더우드였다. 한국 교회에 그런 지도자를 첫 선교사로 허락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런 열정과 안목과 통합의 지도자를 대망해 본다   

ⓒ 옥성득, "언더우드와 성서사업 ①," <성서한국>, 2006년 가을호 

http://kbs.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