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물/침례교인

이종덕 목사(1884-1950)

침례교회 총회장 이종덕 목사, 1950년 순교

1950년 6.25가 터지자 교단 목사들은 이목사에게 피난을 권면했다. 그러나 이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순교자의 길을 같다.

"교단장이 지켜야 할 교단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갑니까?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습니다. 죽이시고 살리시는 권세는 오직 주의 장중에 있습니다."

이종덕은 1884년 6월 15일 충남 공주군 이인면 신영리에서 한학자 이세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부터 한문공부를 시작하여 13년을 정진하고, 1907년 그의 나이 23세때에 부여군 칠산교회 장석천씨에게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나라가 강제병합을 당하자 울적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방황하던 그해 4월에 고명한 선교사를 소개받고 원산에 가서 선교사 말콤 펜윅을 만나서 친히 한국식 식사를 하며 김치와 잡곡밥을 먹으며 한국식 주택을 구해 초가집에서 거주하는 겸손과 전도인들에게 자족의 정신을 고취하여 경영자는 스스로 경작해 먹으라고 강조하는 그의 선교활동이 마음에 들어 수하에서 6개월을 머물며 성경공부를 한 후 교사직분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다.

1912년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개최된 대화회에서 목사안수 받고 1914년 원산에서 열린 대화회에서 펜윅 후임으로 제2대 감목으로 추대되었다.

교단장으로 남북만주, 시베리아 등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에 주력하다가 자신도 직접으로 만주선교에 뛰어들어 봉황성, 임강현, 매화구, 계석현, 안산 등지에서 개척교회를 설립하였고 몇 년 사이에 6개 구역에 100여교회가 되는 등 이감목이 아니면 해내지 못할 초인적인 역사였다. 이어 시베리아 몽고지역까지 선교사를 파송했고, 1921년에는 간도에서 성경학원을 설립해 교역자 양성에 진력했다.

1924년 전임자가 세운 규례대로 10년의 임기를 마치고 감목직을 사임하여 제3대 감목으로 전치규목사를 감독으로 세웠고 공로가 있는 감목에게 주는 안사의 명칭을 받아 전국 순회부흥에 나섰다. 1930년대 신사참배로 교회를 박해할 때 동아기독교 지도자들은 끝까지 거부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 구금당할 때 이 목사도 함게 체포되었다.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루고 1938년 2월에 만주 봉황성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 그후 8년간 남북만주를 순회하면서 교회를 돌보았다.

1945년 해방되고 1946년에 귀국한 이목사는 교단 재건대열에 활약하였고 그해 9월 강경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교단 총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역자 임명제를 교회 초빙제도로, 감목제도를 회중제도로 바꾸었다. 이 총회장은 교단발전을 위하여 고등성경학원을 개원하고 1차로 52명의 학생을 모집하고 원장에 취임하였다.

1949년 39회 교단 총회에서 동아기독교회를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미국 남침례회와 제휴하여 손잡고 선교사업을 착수했다.

그러나 1950년 6.25발발하자 총회장으로 총회본부를 지키다가 9.28 수복 시에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하여 금강교까지 끌려가다가 총탄에 맞아 순교당했다.

--한국기독교순교자사업회 웹사티트에서

http://kcmma.org/board/bbs/board.php?bo_table=bd1&wr_id=77&page=14&ckattempt=1

아래는 위의 잡지에 실린 김용해 목사가 쓴 이종덕 목사에 대한 회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