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이야기] 1
1894 청일전쟁 중 평양 널다리교회의 기적: 소수의 한국인, 일본인 기독교인, 포로로 감옥에 있던 중국인 병사들이 함께 드린 성탄절 예배
평양에는 소수의 개종자가 있는 기독교 예배당이 있는데, 그들은 대개 박해를 받았다. 중국 군인들이 그 도시를 점령했을 때 웨이 장군은 기독교 예배당과 선교사들은 손대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중국 군대의 어떤 신자들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그 예배당에 가곤 했다. 중국군이 밀려난 뒤에는 일본군 장교들이 그 교회를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기독교 동료들과 포로로 감옥에 있던 중국인 기독교인들까지도 교회에서 그들의 공동의 구세주를 예배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전쟁과 폐허가 사방으로 퍼져가는 공포 속에서도, 그 작고 초라한 경배의 장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전쟁하는 철의 손들을 공동의 형제애로 연합시킨 신성한 곳이었다.
There is a small Christian Chapel at Pying Yang with a few Corean converts, most subjected to persecution. When the Chinese soldiers took possession of the city. GeneralWei gave orders that Christian chapels and missionaries should be held sacred. Some believers among the troops used to go to the chapel to attend the services. After the Chinese were driven out, the Japanese officers not only protected the chapel, but also allowed their Christian comrades and even Chinese Christians who had been taken prisoners to worship their common savior in the chapel. Thus while war and desolation were spreading terror all around, the little humble place of worship was the holy spot at which the love and peace of Christ united the iron hands of war in common brotherhood. -- 윤치호 일기 3권, 1894년 12월 27일.
1894년 청일전쟁 때 9월 25일 평양전투가 발생하여 일본이 평양을 점령했다. 평양 기독교인을 박해했던 관찰사는 걸어서 도망을 갔다. 교인들만 그대로 남았고 널다리교회 장로교인들은 한석진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다. 비록 예배당은 일본군의 숙소로 징발되었으나, 예배는 드릴 수 있었다.
마페트는 8월 말 평양을 떠났다가 6주만인 10월 10일 서울을 떠나 홀 의사와 리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4일간 오는 길에 수많은 피난민과 소와 말의 시체를 보았다. 마페트 일행은 10월 13일 토요일 평양에 도착했다. 선교사들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주일 예베에 많은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리 목사가 보급품과 돈을 가지러 서울에 올가간 사이 마페트는 이질과 말라리아에 걸렸다. 홀 의사는 마페트가 위험하다며 서울행을 권했다. 그러나 마페트는 1주일만에 병상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런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11월 1일에 썼다.
그러나 그는 11월 24일 홀 부인에게 위로의 편지를 써야 했다. 환자들을 돌보며 교인들을 위로하던 홀 의사가 이질에 걸려 진남포-제물포-마포를 거쳐 서울까지 데리고 왔으나 도착 직후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평양에서 한 마지막 일은 4명의 한국인 감리교인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었다. 마페트는 제물포에서 마포로 오는 한강 뱃길에서 홀 의사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천국과 소명 이야기였다. 홀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며 평안히 갔다. 소래에서 홀 의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매켄지는 눈물을 흘리며 12월 31일 마페트에게 위로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도 이듬해 죽었다.
이런 일이 선교사들에게 일어날 때, 평양 널다리교회에서 12월 성탄절이 왔다. 한중일 세 민족이 작은 예배실에 모여 전쟁 중이라도 아기 예수의 오심을 기뻐하며 경배했다. 1894년 12월 25일 성탄절의 작은 기적이 평양에서 일어났다.
그 배후에는 홀 의사의 희생, 마페트 목사의 용기, 소래에서 평양을 방문했던 매켄지 목사의 기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