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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 교수의 글 /일반 논문

“1906-09 아주사 부흥” --그 특성과 한국 대부흥 운동과의 비교

아래 글은 내 논문 “The Azusa Street Revival, 1901-1909: Its Characteristics and Comparison with the 1907 Great Revival in Korea.” In Won-mo Suh ed., Protestant Revivals in the 20th Century and Pyongyang Great Awakening Movement (Seoul: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2006), 353-411.요약이다.

*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 운동 *

-담당 교수: 권평 박사  -발표자: 조하식

“1906-1909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 운동” -그 특성과 한국 대부흥 운동과의 비교

-옥성득(캘리포니아주립대)-

서언(序言)

세계 종교의 관점에서 본 20세기는 오순절 운동의 시대였다. 1901년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의 은사는 불과 수십 명이 체험했으나, 1996년 조사에서는 5억 명으로 늘어나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다. 이를 가리켜 미국의 <라이프> 지에서는 지난 2천 년간 인류에게 미친 100대 사건의 하나로 1906년 4월 9일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을 꼽을 만큼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교단이 되었다. 한편 한국 종교의 관점에서 본 20세기는 개신교의 시대였다. 1901년에는 약 26,000명(조선 인구의 0.2%)에 불과했으나 2000년에는 1,400만 명(남북한 총인구의 20%)으로 불어나 전 세계를 통해 가장 급성장한 사례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순절 교회의 세계적 확산이 아주사의 부흥에서 비롯했다면 한국교회의 전환점은 1907년 평양 장대현 장로교회에서 이루어졌다. 한 세기 만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어떻게 개신교 최대 집단이 되었을까? 그 기점이 된 아주사 부흥 운동의 초기 역사 3년(1906-1909)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는 취지에서 원저자는 100여 년 전의 사회적, 신학적 배경 및 부흥 운동의 특징과 그 지도자들이 지향한 부흥 신학을 살펴본 다음 한국의 대부흥 운동과의 관련성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1906-1909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

1)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1906년 4월 18일 밤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대지진은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최대의 재앙은 사람들을 사도신앙선교회로 모았다. 기도와 찬양 가운데 방언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7년 대환란의 시작이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대략 열흘 전부터 성령을 체험하고 있었기에 임박한 재림의 징조라고 믿었다. 하지만 <로스엔젤레스 데일리 타임스>는 이를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지껄이는 바벨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기이한 신조어를 토하는 새 종파가 낡은 창고에서 광신적인 의식을 행하면서 모두 미친 듯이 흥분 상태로 몰입한다는 비난이었다.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울부짖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이 견디지 못할 지경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린 사람들은 죄다 아주사 선교회로 모여들었다. 언론의 박해는 오히려 무료 광고를 대행한 형국이었다. 지도자를 자처한 이는 눈먼 흑인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였다.

2) 보니 브래 애비뉴 214번지의 작은 가정집 기도회에서 시작된 부흥

시모어는 1906년 2월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방언이야말로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라고 설교해온 터였다. 그러나 반대파 가운데 허친슨은 자신들은 이미 성령으로부터 성결을 받았다는 믿음에서 시모어의 교회 출입을 막았다. 이에 청소부로 일하는 흑인 청년 리(Edward S. Lee)가 자신의 집을 개방했다. 이어 애즈베리 부부도 장소를 제공했다. 곧바로 터진 리 씨의 방언은 집회를 통해 소개되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다. 제동을 건 허친슨까지 방언을 하는 역사로 인해 성결파 회중들이 오순절 성령 세례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3) 아주사 스트리트 312번지 사도 신앙 선교회 부흥

나날이 집회 참석자가 차고 넘쳐 마구간 냄새가 나는 데로 옮겼다. 매일 세 번 토끼장 같은 곳에 300~350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고 시모어는 신발 상자를 설교단으로 이용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국적, 인종, 종파를 초월해 예배를 드리니 방언하는 자가 150명에 달했다. 국외 방문자들에 의해 그들의 고향에서 성령 운동이 일어났다. 소식을 들은 선교사 번스타인은 중국에서 들어와 정식 어학교육을 받지 않고도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를 확인했다. 놀라운 부흥의 이야기는 북미와 유럽에 전해졌고 자신들의 목격담을 기고문에 남겼다. 당시 소수 주변인들의 언어와 행동은 분명히 주류 사회를 향한 대항 문화적 성격을 띠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뒤에도 신문의 논조는 여전히 이들을 광신적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아주사 부흥 운동이 오순절 운동으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견하지는 못했다.

2. 교회사적 배경: 성결 운동과 부흥 운동 – 휴스턴과 웨일즈에서 로스엔젤레스로

1) 파햄의 사도 신앙 운동 – 성결 운동과 방언 운동

시모어는 노예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랐다. 20대는 감리교회에 다녔고 30대는 성결교회에 나가며 성결 부흥 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거기서 여성 설교가 패로우의 공중 기도와 방언을 보고 자신의 생애를 바꾸는 전기를 맞았다. 그녀의 소개로 파햄(Charles Fox Parham)이 세운 휴스턴의 오순절 성경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1898년 파햄은 벧엘 신유의 집에 이어 1900년에는 벧엘성경학교를 세워 전국적인 신유 성결 운동에 참여했다. 줄기차게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가 방언이라고 가르치는 가운데 1901년 첫날 아침 7시에 오즈맨 양이 파햄의 안수를 받고 방언을 시작했다. 이를 들은 체코인은 그것이 보헤미아 말이라고 증언했다. 그렇게 사흘간을 쉬지 않고 기도하는 동안 다른 학생들도 성령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길거리로 나가 열심히 전도한 결과 세 개의 교회를 세웠으며 그것이 오순절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한편 시모어는 파햄의 강의를 들으며 그녀의 성령 세례관을 수용했다. 그것이야말로 종말의 대환란을 피할 수 있는 봉인이라는 견해를 받아들인 터였다. 1906년 2월 시모어는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했다. 바로 전해 휴스턴을 방문한 흑인 여신도 닐리 테리가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 목회자로 초청한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산타페 선교회에서 쫓겨나 가정집에서 말씀을 전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러 온 이는 성결협회 회장인 로버츠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방언을 원한다며 시모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모어가 여기 오기 약 1년 전부터 도시 부흥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순회 설교가인 바틀맨(Frank Bartle-man)이 힘을 보탰다. 그는 아주사의 부흥이 세계 부흥의 출발점이며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오순절의 시작은 보니 브래 거리 214번지의 작은 집에서 열린 기도회로부터였다.

2) 웨일즈 부흥 운동과 로스엔젤레스

미국의 오순절 운동에서 강조한 종말의 갱신론은 해외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으로 더 강해졌다. 1902년 7월 영국 케스윅 대회를 통한 기도회가 전 세계의 성령 강림에 대한 열망을 확산시켰다. 부흥사 체프맨(Chapman)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새 전도법이 도시 빈민과의 거리를 좁혔다. 1904.8월~1905.6월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으로 10만 명이 개종했다는 소식으로 인해 로스엔젤레스에서는 더욱 부흥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요엘서(2:23-29)에서 말씀하신 ‘성령의 늦은 비’가 쏟아질 것으로 믿는 분위기였다. 그 기폭제가 된 웨일즈 부흥은 기존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아무런 각본이 없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게 전부였다. 성령의 임재와 권능에 대해 순종함으로써 비전통적인 행위를 정당화했다. 공개적인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등 진지한 연합 기도회가 능력을 발휘했다. 응당 신분의 귀천이 없어지고 여성과 평신도의 지도력이 향상되었으며 민주주의 발전을 가져왔다. 신행이 일치하는 생활 전도를 통해 온갖 사회악이 감소한 것이 부흥의 튼실한 열매였다.

3. 사회사적 전개: 도시 주변인(흑인, 여성, 이민, 노동자)의 공동체 운동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부흥은 주기적으로 일정한 사회문화적 토양이 갖춰진 곳에서 일어났다. 주로 영적 체험이 갈급한 시점에서 발생하므로 기존 사회 제도에 심각한 손상을 주지는 않았고, 소외 계층의 불만을 분출하는 안전밸브의 기능을 소화해 왔다. 동시에 회개와 개종을 강조하며 새로운 교파나 종파를 만들어내면서도 초교파주의를 확산하는 것이 부흥 운동의 특징이었다. 아주사 부흥 운동 역시 사회학적 특징 이외에 교회론적인 여타 특징들을 보여준다.

1) 두 개의 비전이 충돌한 도시 로스엔젤레스 - ‘새 예루살렘’ 대 ‘새 로마’

20세기 초 로스엔젤레스는 시모어가 뿌리는 성령 메시지가 영혼에 뿌리를 내릴 만큼 옥토였다. 1846년 미국 영토가 되면서 골드러시가 시작되고 기차가 들어오면서 1910년에는 유색 인종의 비율이 도시 인구의 22%를 차지했다. 저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주택, 직업, 교육, 의료 문제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게다가 백인 우월주의가 판을 쳤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접촉을 금지하는 ‘짐 크로우 교통법’의 공포도 모자라 남가주대학 총장 위드니는 <아리안족의 인종 생활>이란 책에서 LA를 대놓고 새 로마로 칭송할 정도였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보면 로스엔젤레스는 새 예루살렘이었다. 급속한 도시화와 인구 유입으로 수많은 신조의 고향이 되었고 영적 갱신 운동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의 아들인 시모어는 십자가의 피와 성령 세례를 통한 변화만이 진정한 인종 화합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2) 도시 주변인의 부흥 운동

아주사 거리의 부흥은 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오순절 운동의 가치는 하층계급의 불만을 영적으로 승화해준 종교활동이었다. 흑인들은 노예 해방 이후 자유를 처음 맛보았으며, 시골을 떠나 도시에 이주한 첫 세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화 및 이민화의 물결 속에서 이들에게 대도시는 너무 위험천만한 공간이었다. 밤낮 온갖 냄새와 갖가지 소음에 시달리는 아주사 거리는 흑인들로 북적였다. 그 인근 지역조차 흑백 인종은 물론 본토인과 이민자가 뒤섞여 사는 곳에서 도시 노동자와 빈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탈출구였다.

시모어는 하층민들을 모아 놓고 고난과 환란이 심할수록 성령의 이적과 기사를 구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평등과 평화의 새 왕국의 도래, 곧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고 주장했다. 그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방언과 성령의 은사였다. 그것이 종교적 해결이었고 심리적 보상이었다. 그에 힘입어 도시 노동자들에게 소속감을 주면서 전도에 대한 소명의식을 일깨웠다. 그가 클라라 럼과 공동 편집한 <사도 신앙>에서는 선교회의 부흥을 미국 전역에 확산하는 한편 주류 교회에 만연한 인종 차별과 성차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나님께서는 피부색이나 교육수준 등 무슨 조건이든지 부족함을 이유로 사용하시기를 거절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시모어가 요구한 것은 물신주의 타파와 엄격한 개인 윤리였다. 일터에서도 성령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가정과 직장 간의 균형감을 강조했다. 재정적으로 실용적인 신앙을 요구했음에도 일부 노동자들은 집을 팔고 직업과 가정을 버리는 등 부작용이 뒤따랐다. 신약시대로 환원된 교회의 특징을 오해한 결과였다. 그 선상에 놀랍게도 백인 우월단체를 지지한 파햄이 있었고, 소위 성령 운동가로 알려진 케시웰이 있었다. 심지어는 시모어마저 흑백갈등을 이유로 백인 지도자를 배제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로 인한 교회 분열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보고자의 눈에는 모두 믿음이 연약하거나 아직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해 벌어진 일들로 보였다

4. 신학사적 논쟁: 성령 세례와 방언과 오순절 운동

1) 성결 운동과 오순절 운동

성결 운동의 핵심적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전적 성결에 있었다. 감리교와 장로교 출신의 일부 성결 운동가들은 인간의 세 단계를 불신자, 개종자, 완전 성결자의 순으로 나눴다. 마지막 단계는 제2의 축복이요 성령 세례를 경험할 때 온다고 믿었다. 1857-1858년 성결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던 팔머(Phoebe Palmer)는 성령 세례는 곧 성화라고 주장했다. 장로교인 보드맨은 1858년부터 발행한 <고상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잡지를 통해 성결 교리를 초교파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남북전쟁 이후 영적 기갈을 배경으로 1867-1883년까지 개최한 ‘전국 캠프 집회 연합회’에서는 웨슬리언 성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등 여러 움직임이 있었다.

그밖에 오순절 운동의 배경에는 부흥 운동, 성령 운동, 선교 운동이 있다. 19세기 말 무디와 20세기 초 토레이의 부흥 운동과 더불어 1870년대 스미스 부인의 케직 사경회는 칼빈주의를 기조로 성결 운동을 이끌어 갔다. 곧바로 케직 사경회를 미국에 소개한 이는 무디였고, 피어슨(A. T. Pierson), 심프슨, 고든은 고상한 그리스도인이 영적 생활을 영위하려면 성령 세례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성령론과 전천년설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기초가 되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감리교는 웨슬리언 성결운동에, 장로교는 케직 사경회에 영향을 받았다. 즉, 한국 선교는 오순절 운동의 전 단계인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영향권에 있었다. 반면에 중국내지 선교회 운동은 영국 자비량 선교단체의 후원을 받았다. 이는 1890년대 미국의 성경학교 운동과 전술적으로 제휴하면서 빠르게 확산하였다. 전천년설을 지지한 믿음 선교 운동은 표적과 기사를 강조한 원조 오순절파와 무디의 부흥 운동과 함께 피어슨, 고든, 나이아가라의 성령 운동으로 발전한 원조 근본주의파로 나누어졌다. 전자는 1903-1907년 대부흥 운동 기간에만 영향을 미쳤으나 후자는 한국의 장로교와 침례교로 연결되면서 한국 선교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1893-1900년까지 성결 운동은 주류 교단의 인정을 받지 못해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고, 1920년대 오순절 운동이 알려지면서 해방 후에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2) 2단계 구원론과 3단계 구원론에서 성령 세례의 위치

파햄과 시모어는 세 단계의 구원론을 펼쳤다. 즉, 1단계는 중생, 2단계는 성결, 3단계는 성령 세례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거에는 혁신적인 요소가 있었다. 성경에 적시한 방언의 회복이야말로 부흥을 통해 재림 직전에 일어날 오순절을 재현하는 핵심적인 사건으로 해석한 바였다. 이는 초기 오순절 신학과 정체성의 기초를 이뤘고 이후 성결 오순절주의로 발전했다. 문제는 사도 신앙 운동을 이끈 파햄의 인종주의적인 발언에 있었다. 비록 예배의 질서를 중시했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사고를 자주 드러냈다.

반면에 시모어의 사도 신앙 선교회는 흑인과 여성,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사역을 전개했다. 그는 회중의 즉흥적이고 황홀경에 빠진 행동을 자유롭게 허용했다. 전통적 범주의 경계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형식이었다. 한편 감리교회와 웨슬리언 성결 운동의 지도자들은 전통적인 웨슬리의 2단계 구원론을 지지했다. 즉 가운데 성결을 건너뛰고 중생과 성화의 단계를 거치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시모어를 포함해 파햄과 바틀맨의 아주사 오순절 운동을 싸잡아 공격했다. 요체는 소란스러운 진행을 싫어한 데 있었고 성결은 평생 지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3) 시모어와 바틀맨의 종말론적 부흥 이해

시모어는 성령 세례를 통한 일치, 겸손,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했다. 아주사 선교회에서 내세운 방언보다는 사랑을 실천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아주사의 독특한 인종별 문화의 역동성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평등을 실현하면서 개인의 성화와 전도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본 터였다. 또한, 바틀맨은 웨일즈는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능력 회복을 위한 요람으로서의 역할만 맡았다고 보았다. 아주사 공동체는 그들의 성령 체험과 부흥을 종말론적 소망의 구체적 실현으로 이해했다. 아주사 부흥의 오순절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으며 새로운 성령 시대의 시작으로 파악한 것이다.

4) 아주사 부흥과 세계 선교

세계 선교의 관점에서 아주사 부흥이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우선 새로이 발견한 방언을 선교를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 파햄이나 다른 오순절 운동가들도 이를 받아들였다. 다음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함으로써 사도적 기사와 이적이 마지막 날에 회복되리라고 믿었다. 이러한 성령론은 선교의 활력과 지속성에 도움을 주었다. 끝으로 별다른 조직이 없는 아주사 선교회를 통해 세계로 흩어지는 모본을 보여주었다. 흑백과 남녀는 물론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도 두지 않았다. 뉴욕의 바래트는 고향인 노르웨이로 돌아가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고 전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에 힘입어 오순절 선교는 성령론에 근거해 토착교회들을 설립하고 급성장했다.

5.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과 한국 대부흥의 비교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한국의 대부흥 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절정을 이뤘다. 그 특징과 결과는 다음 8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성’으로써 극동 아시아의 한반도에서 웨일즈까지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 만주 등 지구촌으로 확산하였다. 둘째, ‘도시성’으로써 원산에서 목포까지 도시 면모를 갖춘 개항지로부터 부흥이 일어났다. 셋째, ‘주변성’으로써 부흥 운동이 지방에서 일어나 서울로 전해졌다가 다시 지방에서 절정을 이루는 형태를 띠었다. 넷째, 예배를 통한 ‘민주적 평등성’을 실현함으로써 신분 차별과 남존여비 사상을 타파하는 등 사회적 민주화를 앞당겼다. 다섯째, ‘환원성’으로써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여섯째, ‘종말성’으로써 연이은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민중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복음이 새로운 소망이 되었다. 일곱째, ‘반정치성’으로써 사회적으로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놓고 교회가 비정치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종교적 해결을 도모하는 슬기를 보였다. 여덟째, ‘창의성’으로써 한국교회의 부흥 과정에서 독특한 예배의식과 토착적인 교회문화를 창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만 한국의 대부흥에는 방언이 없었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이 지점에 착안해 원저자는 우리나라 대부흥 운동을 20세기 초 오순절 운동이 아닌 19세기 후반의 성결 운동의 하나로 파악해 부흥의 맥을 이었다고 본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점은 같은 회개 운동이로되 한국의 경우에는 국가 멸망의 원인을 민족 전체의 죄악이 낳은 결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나라의 흥망을 두고 중보하며 죄성의 본질적 문제로 연관시키는 성숙한 신앙의식이 발현되었다는 점은 한국의 대부흥 운동을 통해 기록한 교회사적 의미를 넘어 역사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결어(結語)

본고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주사의 부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세대주의 종말론과 성결 운동을 배경으로 발생했다. 이는 흑인, 여성, 이민자, 노동자 등 소외된 주변인들의 공동체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차별의식이 팽배한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매사 근검절약은 물론 금연과 금주 등 절제하는 생활 방식을 통해 엄격한 개인 윤리와 도덕성을 지지했으나 노동조합 결성과 같은 정치적 운동에는 반대했다.

신학적으로는 구원의 2단계설 대신 3단계설을 주장했는데 보고자는 중간 단계인 성결을 평생에 걸쳐 지속하는 단계로 두는 것에 동의하는 편이다. 아주사 부흥 운동에서는 방언을 3단계의 성경적 증거로 보고 사랑과 겸손을 강조했다. 그 결과 오순절 교회사는 세계 선교의 디아스포라 운동의 산 역사가 되었다. 21세기 세속화로 치닫는 교회들 안에서 거대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림으로써 구원사를 이루는 대역사가 있기를 기도한다.

The leaders of the Apostolic Faith Mission. Seymour is front row, second from the right; Jennie is back row, third from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