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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성결교인

성결교회 정운학 목사 일대기

만주 심양에서 양떼를 지키다가 숨진 선한 목자 정운학(鄭雲鶴, 1910-1966?) 목사의 일생이다.

일본 유학 중에 개종하다

정운학은 1910년 인천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인천상업전수학교에 재학 중 미술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함으로 그는 장차 화가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전수학교 졸업과 동시에 평소의 꿈대로 동양의 최고 미술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지원, 거뜬히 합격했다. 당시 조선인으로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만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이 심했다.

그는 동경의 어느 일인의 하숙집에 기거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그림도 열심히 그렸다. 동료 학생들은 그의 이름 대신에 ‘죠센징’이라고 불렀다. 죠센징은 조선인이란 일어이지만, 멸시하는 이름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일인학생과 여러 번 다투었다. 그는 학교에서 일인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공부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이런 멸시 속에서 공부한다는 것에 별 의미가 없어서, 그는 공부를 포기하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먹었는지 모른다. 일인에 대한 민족적 반감이 그의 정신을 괴롭혔다.

하루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하숙집 주인 아저씨가 그의 방을 찾았다.

“데이(정)상. 하숙생활에 불편한 점이 없어요?”

“예. 주인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우리 내외가 아무리 잘 해준다 해도, 조선의 부모보다 낫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평소 주인내외가 그에게 너무 잘해주는 것을 생각했다.

“아저씨. 저는 일인들이 싫어하는 죠센징인데, 왜 친절하게 해주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요? 데이 상은 저와 똑같은 형제이지요. 형제에게 잘하는 것 당연한 일 아닙니까?”

“예? 우리가 형제라구요? 일본인과 조선인이 형제란 말입니까?”

“그렇지요. 본래 인류의 조상은 아담과 이브지요. 모든 인류는 그의 자손이고요.”

이렇게 시작된 주인과의 대화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 대화를 통해 그는 주인의 전도를 받았다. 일반 일본인과는 전혀 달리,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 주인의 사랑에 그는 감화를 받았다. 그는 주인의 권면에 따라 주일에 주인이 다니는 일본인 교회에 처음 참석했다. 일인 목사의 설교나 일인들과 함께 부르는 찬송을 통해, 그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자손이며, 동시에 하나님은 만백성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미워하지 않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깨달았다. 예배 후에 주인 아저씨의 소개에 따라, 그가 조선인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들이 그에게 진심으로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흐뭇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면서 “기독교 신앙만 있다면 일본과 조선은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거야. 기독교야 말로 인류평화의 종교다”라고 생각했다.그는 이런 소박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교회에 다니다가 세례도 받았고, 이 신앙 때문에 대학생활 4년간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이성봉 목사 부흥회에서 통회하고 중생 체험, 1935년

1934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정운학은 귀국하여, 모교인 인천상업전수학교에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믿은 신앙을 성장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인천성결교회에 다녔다. 그는 틈이 나는 데로 그림을 열심히 그려, 작품전시회를 통해 화가로 출세할 뜻을 계획했다.

1935년 5월에 그의 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학교수업 때문에 둘째 날 저녁시간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았다. 일본 유학 중 일본인 교회에서 받은 조용한 감화가 아닌 생동적인 감동이었다. 그는 평소 새벽잠이 많았지만 이 감동을 유지하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성령의 강한 역사로 회개가 터졌다. 그리고 이성봉 목사의 안수기도로 강한 믿음을 통해 중생을 체험했다. 그 순간 그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그의 속에 오랫동안 안개처럼 서려 있던 초조와 불안이 의의 태양 예수의 빛으로 말미암아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과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동시에 그림을 그려 출세하려던 그의 소중한 계획이 하찮은 것으로 생각 되어졌다. 그래서 그는 아침에 학교로 출근하는 발걸음을 교회로 돌려 부흥회 낮 사경회에 참석했고 밤 집회에도 참석하는 등 하루 세 번의 집회에 계속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평소 과묵하던 그의 입에서는 설교말씀마다 ‘아멘’ 응답이 터져 나왔다.

며칠 동안 그를 계속 지켜보던 이성봉 목사가 마지막 사경회를 마치는 날 그를 따로 불렀다. 그리고 그의 신상에 대하여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그에게 헌신을 권면했다.

“동경 미술학교를 나왔다니, 자네는 그림의 천재일세. 세상에서 화가로 출세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일에 비하면 그까짓 화가는 아무 것도 아닐세. 이제 우리 기독교는 자네같이 학식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네. 화가를 버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지 않겠는가?”

이성봉 목사의 카리스마적인 간곡한 권면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멘”하고 응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돌아볼 때, 목사가 될 자질과 지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매사에 그만큼 신중하게 대처했다.

  그는 부흥회가 마친 후, 이성봉 목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준비기간이 필요함을 깨닫고 미술 교사직을 사직하고 그처럼 아끼던 그림도구들마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결단성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는 목포교회로 내려갔다. 그는 목포교회에서 이성봉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교회의 사찰집사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교역자의 길을 준비했다. 당시 그는 대학 졸업자로서 사람들이 드물게 보는 지식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사도 바울처럼 세상 지식을 분토처럼 버렸던 것이다.그는 이성봉 목사의 중매로 그 교회 홍순덕 양과 결혼, 1남 2녀를 낳아 기르면서 주의 일에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했다.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다, 1937년

1937년 봄에 이성봉 목사가 목포교회를 떠나 신의주동부교회로 전임할 때 그는 이성봉 목사의 추천으로 비로소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정운학은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 후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지기 위해 더욱 경건생활로 일관했다. 특히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 세 차례의 기도를 졸업할 때까지 강행했다. 그것은 새벽기도와 정오의 기도, 그리고 취침하기 한 시간 전의 기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읽기도 하루 세 차례씩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육신의 양식을 하루 세끼 먹듯이 영의 양식도 하루 세 번은 먹어야 한다면서 식사 후 반드시 한시간씩 붉은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성경을 통독했다. 또한 그는 신학서적 읽기에도 힘써 기독교적 지성함양에도 힘썼다. 

특히 그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으로 일어와 영어에도 능통하여 일어나 영어 서적도 읽을 수 있는 지식인으로 더욱 열심을 냈다. 그러나 일어나 영어 서적은 값이 비싸서 쉽게 구할 수 없었기에 학교가 쉬는 월요일이면 그는 오후에 반드시 시내 서점에 가서 일어나 영어의 원서를 서서 읽었다. 그는 가난한 신학생이라 많은 책을 살수는 없었지만 신학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무조건 찾아 읽었다.  

부엉이로 구안록을 사다

어느 날 그가 서점에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읽고만 말기에는 너무 아까운 책이었다. 그것은 일본어로 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의 『구안록』(求安錄)이었다. 일본의 정신적 지도자인 우찌무라 선생이 청년시절에 정신적 방황을 하다가 예수를 영접한 후 비로소 평안을 얻은 일종의 간증록이었다. 이 책에는 심금을 울리는 문장과 금언과도 같은 글귀가 많아서 그는 무척 사고 싶었다. 책값은 당시 화폐로 40전. 그러나 그의 수중에는 겨우 5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타깝고 아쉬움 속에 그는 책을 서가에 꽂아 놓고 기숙사로 돌아왔지만 그의 눈에는 ‘구안록’이 어른거렸다.

그는 취침 전 기도 시간이 되자 강당으로 내려가 ‘구안록’을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너무 기도가 간절하여 평소 한 시간의 기도가 세 시간으로 연장되었다. 계속된 기도를 통해 그의 마음에 기도의 확신이 오자, 그는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강당을 나섰다. 이튿날 오전 수업을 마쳤을 때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누가 기숙사 자기의 방 앞에 와서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남보다 빨리 기숙사로 4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그의 방 4층에 이르렀을 때 마침 열려진 창문으로 부엉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가 벽에 부딪치면서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얼른 뛰어가서 부엉이를 붙잡고 발을 줄로 묶으면서 “내가 책값을 구했는데, 하나님께서 부엉이로 응답하신 것일까?”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부엉이를 안고 아현시장으로 갔다. 조류 상점을 찾아 부엉이의 값을 알아보니 주인은 40전을 주겠다고 했다. 정확한 ‘구안록’ 책 가격이었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가!

마침내 그는 기도로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책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는 성경말씀을 생생히 체험한 순간이었다. 이 체험 후 그는 더욱 기도에 힘을 쏟았으며, 당시 가난하고 고달픈 교역자의 삶을 기도로 이겨나갈 수 있었다.

정운학은 신학교에 다니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했다. 그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누구를 통해서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신의주 비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심양 북릉교회를 개척, 1940-42년

1940년 봄, 그는 졸업과 동시에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는 신의주 근처 비현교회의 주임전도사로 발령을 받았다. 비현교회는 시골교회였지만 그의 열심 있는 기도와 전도로 말미암아 부흥되었고, 그도 1942년에 목사안수를 받게 됐다. 얼마 후 그는 만주 심양(봉천)에서 목회하는 스승 이성봉 목사로부터 심양에 와서 함께 일하자는 편지를 받고, 즉시 교회에 사표를 내고 가족과 함께 만주 심양으로 갔다.

부흥사 이성봉 목사는 집회를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들에게 시달려 그들의 간섭이 없는 만주의 교회를 자원, 심양중앙교회에 부임하였으며 전임자가 중단한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대부흥 중에 있었다. 이성봉 목사는 1시간을 걸어오는 북릉 지역의 신자들이 안쓰러워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믿음의 아들 정운학 목사를 부른 것이다.

정운학 목사는 이성봉 목사의 후원을 받아 지교회로 심양 북릉(北陵)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1년 후에는 신자 100여 명을 확보했고, 그 여세로 80평 되는 예배당을 건축했다. 붉은 벽돌로 된 성전은 당시 심양 일대에서 가장 큰 교회당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건축대금의 일부를 잔금으로 지불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는 건축업자의 독촉을 자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심방을 위해 교회 앞 큰길로 나섰을 때 건축업자가 험악한 얼굴로 나타났다.

심양의 북릉

“정 목사, 잔금을 언제 줄꺼요?” 건축업자는 인사도 없이 시비조로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몇 주일만 기다려주시면 잔금을 치루겠습니다.”

“뭐요? 그럼 나는 몇 주 동안 굶어 죽으란 말이요? 도대체 돈도 없으면서 교회는 왜 짓는 거요?” 하더니, 그는 거칠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정 목사의 뺨을 철썩 갈기는 것 아닌가. 정 목사의 뺨이 금방 벌겋게 부어올랐다. 갑작스러운 건축업자의 행패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정 목사의 반격을 흥미있게 지켜보았다. 그러나 정 목사는 부어오른 뺨을 만지면서 온화한 음성으로

“제가 지금 뺨 맞은 대가로, 잔금을 한달 연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합니다.” 라고 공손히 인사하면서 그의 눈을 응시했다. 건축업자는 감정을 못 이겨 한 짓이었지만, 내심 심했다고 생각하던 차에 정 목사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만 가버리고 말았다.

당시 이 광경을 길을 지나던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았는데, 그 중 한 중학생이 이 광경을 지켜보다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중학생은 다음 주일에 교회를 찾아와 예수를 믿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정 목사에게 세례도 받았다. 이 중학생이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 00장로교회를 열심히 섬기더니, 오늘에는 그 교회 원로장로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심양북릉교회를 함께 다녔던 이응호 원로장로(예성) 친구의 간증이었다. 정운학 목사는 주님의 산상수훈을 실천한 사랑과 온유의 목자였다.

해방이 되었으나 양떼를 지키다, 1945-66년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고 고향에 가서 부모와 동생을 만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곳을 떠난다면 순진한 양떼는 누가 돌보겠는가? 그것은 선한 목자의 길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조국이 해방되었다. 당시 중국 전역에 있던 한인들은 희망을 안고 귀국을 서둘러 귀국선은 1년 동안 계속 운영됐다. 몇 개월 동안 심양에 있던 한인교회의 목사들이 거의 귀국하여 각 교회마다 신자들은 목자 없이 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이성봉 목사가 귀국선의 배표를 준비한 후 정 목사를 급히 불렀다.

“정 목사. 이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양떼를 먹이느라 수고가 많았네.”

“저보다 선생님께서 더 수고가 크셨지요.”

“그래. 이제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나와 함께 조국에 가서 목회를 하세.”

“선생님. 목자들이 모두 귀국해 버리면, 여기 있는 양떼들을 누가 돌볼 것입니까? 저는 여기 양떼들을 버리고 혼자서 귀국할 수 없습니다.”

“정 목사. 그 생각을 깊은 기도 중에 결정했는가?”

“예. 선생님.”

하며 그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성봉 목사는

“그렇다면 내 강요할 일이 아니지. 그럼, 나는 먼저 귀국할테니, 마음이 바뀌면 곧 따라 들어오게나.”

라고 말한 후 이튿날 귀국했다.  

정 목사도 인간인지라 오랫동안 압박과 설움을 떨쳐내고 해방된 자유 조국의 품안에 어찌 안기고 싶지 않겠는가. 고향에 가서 부모와 동생들을 어찌 만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지금 심양을 떠난다는 것은 늑대가 몰려 올 줄 알면서 순진한 양떼를 버리고 달아나는 것과 같다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선한 목자의 길이 아니라고 깨달은 것이다. 당시 중국은 모택동 팔로군의 득세로 점점 공산화가 되고 있었다. 그는 귀국을 포기한 채 귀국할 수 없는 북릉교회 성도들을 심방하고 위로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목사들이 모두 떠난 심양 일대의 한인교회들을 찾아 일주일 내내 순회하면서 예배와 특별집회를 인도하였으며 그들의 심령을 어루만지느라 매우 바쁘게 일했다.

정 목사의 동생 정운상이 1949년 20대 청년시절 형으로부터 온 마지막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비장한 것이었다.

“… 나는 만주지방의 여러 교회를 돌보고 있다. 목사들이 모두 귀국해 버렸으니, 이곳 순진한 양떼들을 누가 돌보겠느냐? … 지금 중국에는 팔로군이 득세하여 종교 탄압을 하고 있어 점점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개인의 안일과 편의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 아니다. 우리의 의무와 사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죽음이라도 돌파하는 것이 주의 종이 아닌가?…”

이 편지에서 순교를 각오한 듯한 내용을 엿볼 수 있다. 다가오는 순교의 고난을 각오하면서도 정운학 목사는 개인보다는 교회를, 자신의 안위보다는 목회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다.

그 후 6·25전쟁이 돌발하고 중국이 북한을 위해 참전함으로 40년간 교류가 단절되면서, 정 목사의 소식은 확인할 수 없었다. 1990년에 교류가 시작되자 동생 정운상 목사는 2번이나 심양의 일대를 다니며 형의 생사를 추적했으나 끝끝내 찾을 수 없었다. 정운상 목사는 심양의 기독교 연합회로부터 1966년 중국 문화대혁명 시, 홍위병들의 발호로 수많은 목사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때 함께 순교했을 것이라는 증언만 들었을 뿐이었다. 신앙의 양떼를 지키다 숨진 정운학 목사는 주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였다

자료제공: 2006년 성결신문 디지털 성결에 연재된 글을 유정부 님이 보내주어서, 일부 문장을 수정 편집해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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