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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성결교인

증도의 전도사 문준경

문준경(文俊卿, 1891-195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631

1891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때인 1908년 3월 결혼했지만 남편이 제대로 돌보지 않아 20여 년을 시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기독교에 가입하고 경성성서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부터 신안군 지역을 순회하며 증동리교회를 중심으로 진리교회와 대초리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설립했다. 그는 지역을 순회하는 도중 주민들의 부탁으로 우체부의 역할도 했고, 여러 섬들을 왕래하느라 1년에 아홉 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었다고 한다. 1943년 일제의 종교탄압이 증동리교회에도 진행되었을 때,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지만 저항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신안군 도서 지역은 좌익들의 활동이 강했고, 6·25전쟁 중에는 섬 전체를 인민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던 문준경은 이성봉 목사 등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증도로 돌아왔는데, 이는 자신이 돌보고 있던 교인들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4일 국군이 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좌익들이 교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고, 문준경 역시 1950년 10월 5일 총살당했다.
현재 문준경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신안군 증도면사무소 옆 증동리교회에 문 전도사의 추모비가 있다. 원래 그의 무덤도 이 증동리교회 뒤 편 산에 있었지만, 2005년 증동리교회 앞바다 즉 문 전도사의 순교 현장으로 이전했다. 2013년 문준경의 순교기념관이 신안군 증도면에서 개관하였다.

참고문헌: 믿음의 흔적을 찾아 한국의 기독교 유적 (송현강·이순자·이진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하나님의 거처 (박은배, 새로운 사람들, 2009) 「기독교 민족지도자 양성 앞장 문준경 삶 뮤지컬로 재조명」(『전북일보』2015.2.1.)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www.mjk1004.org)

증도 가는 길

 ====================================희년의 사람들====================================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 - 사회적 책임과 전도가 용서와 만날 때 - 

박창수 

 


박복영(朴福永, 1890-1973)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에 있는 암태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릴 때 한학을 했지만, 1908년에 목포 성경학원에 들어간 후 기독교 전도 사역에 헌신하였다. 1919년 삼일 운동 당시, 선생은 목포에서 기독교인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수백 명의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은 1920년에 석방된 후, 고향인 암태도로 들어가 ‘암태 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물산장려운동과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21년에 ‘여자 강습원’을 설립해서 여생도 40여명을 교육시켰고, 1922년에는 ‘암태 사립 3.1학사’를 설립하여 학사장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야학을 6개소(나중에는 12개소로 증가)나 설립해서 30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교육 운동에 매진하였다. 

선생은 1923년, 수확량의 7-8할에 이르는 살인적인 고율의 소작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암태 소작인회’를 조직하도록 하여, 1924년까지 이어진 암태 소작쟁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선생은 암태도에서 해마다 3천석의 소작료를 걷고 있던 지주(地主) 문재철과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을 때, 성경의 ‘출애굽기’를 떠올렸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해 이집트 왕과 몇 차례나 담판하였으나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의 권능으로 그 역사는 성취되었다. 

소작농민들은 단결하여, 1923년 가을 수확기에 벼 베기를 거부하였고, 일제 경찰의 갖가지 위협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1924년에 지주 측과 물리적으로 충돌한 소작농민 13명이 목포 경찰서에 구금되자, 암태도 주민들은 배를 타고 목포 경찰서로 몰려가서 아사(餓死)동맹의 농성을 결행하였다. 

보라! 저 600여명의 남녀노유(男女老幼)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명까지 내어놓고 법정에서 천(天)으로 더불어 이불을 삼으며 지(地)로 하여금 요를 삼고 수 삼일을 기아(飢餓)하면서 주린 창자를 움켜잡고 마르는 목을 견디면서 13인 형제의 방면을 애호비읍(哀呼悲泣)하는 비절참절(悲絶慘絶)한 애경(哀景)을 보라!”(<동아일보> 1924년 7월 17일자) 

암태 소작쟁의는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에 의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소작료를 4할로 인하하는 데 지주 문재철이 동의하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농민 운동이 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윤성덕 목사와 함께 상해로 가려다가 신의주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3개월간 구류를 당하기도 했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책임을 맡아, 상해와 국내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선생은 1925년에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부탁하는 이시영 선생의 밀서를 갖고 국내로 잠입하여 이상재 선생에게 무사히 전달했지만, 모금 활동을 하던 중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은 출감한 후에도 1926년에 ‘암태 남녀학원’을 설립하였고, 같은 해에 동아일보 목포지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 암태도 옆에 있는 자은도에서 소작쟁의 운동을 배후에서 이끌다가 광주 형무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 선생은 출감한 후에는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을 조달하였는데, 암태 소작쟁의 당시의 지주였던 문재철이,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 온 선생에게, 거액을 쾌척한 일화는 유명하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부 경무 주임, 해방 후에는 무안군 건국준비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복영 선생과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복음전도자인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의 헌신적인 노력은 연합하여 자은도를 비롯하여 신안군 일대에서 교회의 설립과 성장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선생은 일제에 의해 수배를 받자 자은도 백산으로 피신하여 백산학당을 세워 신교육을 장려하였고, 공회당에 젊은이들을 모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 후에는 선생이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는데, 이 때 백산 기도소가 개척되었다. 

한편 문준경 전도사는 박복영 선생의 고향인 암태도에서 태어났는데, 지주 문재철은 그 친족이었다. 문준경 전도사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08년에 이웃한 증도로 시집을 간 후 남편의 버림을 받고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후,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고, 해산하는 집에 가 산파로서 섬기며,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면서,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전도 사역에 매진하였다. 문준경 전도사는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증도에서 인민군에 의해 목포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가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순교를 각오하고 교회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 증도로 돌아왔고, 결국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순교하였는데, 최후의 순간에도 교인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듬해에 치러진 문준경 전도사의 장례식은 김구 선생이 서거했던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애도하였다. 

문준경 전도사가 개척했던 임자도 진리교회에서는 모두 48명의 기독교인이 순교하였는데, 그 가운데 13명의 가족을 모두 잃은 청년 이인재는 국군이 상륙하여 좌익 청년들을 가려내서 죽이려고 할 때, 오히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고 보호하여 살려 냈다. 그는 부친인 이판일 장로가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이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 원수를 사랑으로 갚은 것이다. 그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임자도로 돌아와서 진리교회를 섬겼다. 그가 보복하지 않고 용서한 결과,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해서 사라진 섬에서 오히려 기독교를 믿게 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는 부흥이 일어났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적 헌신으로 현재 증도는 주민 가운데 90% 이상이 기독교인이고, 신안군 일대의 다른 섬들의 기독교인 비율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높다. 그런데 문준경 전도사는 전도여행 중에 자은도에 와서 사촌 언니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고장교회(현 자은제일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자은제일교회가 전도에 주력하여 1957년에 박복영 선생이 있던 백산기도소를 모태로 자은서부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곧 자은서부교회는 박복영 선생과 문준경 전도사의 공동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필자 일행이 자은도를 촬영하며 인터뷰했던 2009년 당시 자은서부교회는 마을 주민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기독교인으로서, 마을 주민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은 무려 99%에 이른다. 

이런 놀라운 결과는 현재 위기에 봉착한 한국 교회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해 준다. 박복영 선생이 기도소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면서 헌신적으로 민족 독립 운동과 고율의 소작료로 고통 받던 농민을 위한 소작료 인하 운동 등 한마디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실천에 매진하였고, 동시에 문준경 전도사가 헌신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전도에 매진한 두 흐름이, 원수를 용서하는 실천과 하나가 되었을 때, 민족사와 교회사 양 측면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우리 시대에도 기도하면서 이루어지는 민족 통일 운동과 살인적인 주택임차료에 고통 받고 있는 세입자들을 위한 전·월세 인하 운동 등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사역들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이루어지는 전도 사역들이, 원수를 용서하는 실천과 연합한다면, 실제로 통일이 이루어지고 전·월세가 인하되며, 그것을 위해 헌신한 한국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 대신 존경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증가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관건은 각각의 사역자들이 다른 사역자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며, 겸손하게 한 몸을 힘써 지키면서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성경 빌립보서 2장 3-5절). 

참고문헌 

김진경, “[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1>소작쟁의”, <동아일보> 2009년 12월 24일자 29면. 
박순동, 『암태도 소작쟁의』, 이슈투데이(주), 2003. 
임병진·유승준, 『천국의 섬』, 가나북스, 2007. 
자은서부교회, “자은서부교회사.” 
주승민, “주승민교수와 함께 가는 자은 여덟 교회.” 
지영태, “문준경 전도사의 교회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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